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2025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대림의 두 번째 등불이 켜지는 오늘, 한국 교회는 1982년부터 지켜 온 “인권 주일”을 맞이합니다. 또한 2011년부터 오늘로 시작되는 한 주간을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며, 복음을 새롭게 전하는 길이 곧 사회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길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대림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길을 닦는 때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정의와 평화의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햇순을 바라보며, 그 위에 머무를 주님의 영—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을 노래합니다. 그분은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시고, 마침내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평화의 질서를 여십니다. 이말은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라, 메시아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윤리적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 수 없고, 사회 구조 안에서 생명을 살리고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로 드러나야 합니다.
화답송은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불의가 방치된 곳에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가난과 차별, 혐오와 폭력이 자리한 곳, 생태계가 파괴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먼저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그때에야 평화가 꽃처럼 피어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를 주어 희망을 간직하게 한다”고 말하며, 주님 안에서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인권 주일의 핵심은 바로 이 복음적 환대입니다. 국적·언어·세대·장애·성별·경제적 조건을 넘어, 하느님 자녀의 존엄을 먼저 보는 시선, 갈등과 분열의 문화를 치유하는 공동체의 품이 우리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칩니다. 회개는 생각의 전환만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검증됩니다. 오늘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첫째, 존엄을 지키는 말과 행동의 열매입니다. 온라인과 일상에서 혐오와 조롱, 왜곡과 낙인을 멈추고, 사실과 친절, 경청과 대화를 선택합시다. 작은 농담 하나, 무심한 시선 하나가 누군가의 존엄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둘째, 약자와 피해자 옆에 서는 연대의 열매입니다. 노숙인, 이주민과 난민, 장애인과 노인, 아동·청소년,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 돌봄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이름이 잘 불리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구체적 도움으로 응답합시다. 상담 연결, 법률·의료 지원 소개, 생필품 나눔, 겨울 방한용품과 식사 제공 같은 작은 실천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줄이 됩니다.
셋째, 정의로운 구조를 향한 참여의 열매입니다. 사회 교리는 개인의 선행을 넘어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 참여의 원리를 통해 제도와 문화의 변화를 지향합니다. 지역의 공론장과 주민 참여, 공정한 노동 관행, 안전한 일터, 생태적 전환을 위한 선택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냅시다. 투명성과 책임성, 약자 보호를 우선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신앙인의 소명입니다.
넷째, 창조 질서를 돌보는 생태의 열매입니다. 소비를 줄이고, 재사용·재순환을 확대하며, 에너지 절약과 탄소 발자국을 낮추는 생활의 회개를 실천합시다. 생태 파괴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먼저 다치게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림의 등불처럼 우리의 삶이 어둠을 가르는 작은 빛이 되게 합시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가난한 구유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다시 배우고, 사회 교리로 눈을 밝히며, 회개의 열매로 이웃의 눈물을 닦아 주는 신앙인이 됩시다.
----------------------------------
<금주간 성서읽기> 2티모 1-4장 / 티토 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2. 희생: 속죄의 보속 제물
육화의 또 다른 목적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높여진, 자신의 거대한 존엄성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육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가장 합당한 방법이다. 하느님께서 참된 인간 본성을 취하시고, 그와 함께 모든 보통의 인간적 현실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성 대 레오 교황은 성탄 대축일 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존엄성을 깨달으시오, 그리스도인이여. 한때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된 이상, 그 존엄성에 합당하지 않은 삶으로 옛 비천함으로 돌아가지 마시오. 누구의 머리이며, 누구의 몸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지 기억하시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 주제를 사목 헌장 (Gaudium et Spes, 1965) 제22항에서 다루었으며, 이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거듭 인용한 본문이다.
“사실 인간의 신비는 육화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빛을 얻는다. 아담, 곧 첫 사람은 오실 분의 예형이었으니, 곧 주 그리스도이시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심으로써, 인간 자신을 인간에게 완전히 밝혀 주시고, 인간의 최고의 소명을 분명히 보여 주신다.… 그분께서 취하신 인간 본성이 폐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로 우리의 인간 본성도 우리에게 있어서 신적인 존엄으로 들어 올려졌다.”(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