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7,1-9
주님께서는 수난을 예고하신 ‘엿새 뒤’에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평소 사람의 모습 아래 감추어 두셨던
당신의 ‘하느님이신 영광’이
잠시 환히 비쳐 나온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영광을 보여 주셨는가?’
그의 답은 분명합니다.
곧 닥칠 ‘십자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처참한 수난을 볼 때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미리 ‘영광’을 보여 주어
‘이분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하는 믿음을
마음에 새겨 두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율법)와 엘리야(예언자)가 함께 나타난 것도
그분께서 온 성경의 ‘완성’이심을 증언합니다.
구름 속 음성은 단 하나를 명령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화려한 환시보다,
초막 셋을 짓는 일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아드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들음’이 바로 신앙의 성실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며
그 영광의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청을 지나
기어이 산을 ‘내려’가십니다.
영광은 머물러 누릴 ‘끝’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위로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 ―
그것이 절제의 영성입니다.
두려워 엎드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다가가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마라.”
영광 중에도 그분의 손길은
이토록 부드럽고 다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들었을 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빛과 환시가 걷힌 자리에,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남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화려한 체험보다 ‘그분의 말을 듣는’ 데 성실한가?
나는 위로의 자리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가?
나는 두려울 때 ‘손을 대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가?
모든 것이 걷힌 자리에 ‘예수님만’ 남아 계신가?
주님,
당신의 빛을 미리 보여 주시어 십자가를 견디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신 대로 성실히 듣게 하시고,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