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나와 참된 나
영성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만들어진 자아상'에 대한 집착하는 데서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 안에서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참된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만들어낸 관념 속의 '나'와 혼동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요한 3,2)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느님의 선천적이고 객관적인 은총으로 우리가 이미 그분의 자녀라는 충만한 실재를 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만들어진 자아상은 하느님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신만의 자아상을 구축합니다. 이는 성공, 실패, 타인의 평가, 사회적 역할 등 외부적인 요인과 내면의 경험이 축적되어 형성됩니다. 영성 생활의 문제는 이러한 자아상을 절대적인 '나'로 착각하고 여기에 집착할 때 발생합니다.
'선량하고 신앙심 깊은 신자'라는 자아상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실수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위선적인 신앙생활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이라는 부정적인 자아상에 갇힌 사람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절망감에 허덕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만든 자아상은 하느님과의 진실된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참된 나'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행위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실재와 정체성은 하느님과의 결속 안에서만 온전히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된 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감정이나 상황, 타인의 평가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실재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본연의 모습이며, 우리가 평생에 걸쳐 발견하고 회복해야 할 영적 여정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의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는 선언은 이러한 영적 진리를 확증합니다. 이는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우리의 객관적인 신분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의 감정이나 상태, 노력의 정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만들어진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고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며,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참된 영성 생활은 바로 이처럼 하느님의 자녀라는 근원적인 정체성 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자녀 '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려는 응답으로 드러납니다. 이 응답이 태도로 드러나는 믿음의 실재입니다.
믿음의 실재에 직면하면 언제나 먼저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내것으로 만들지 않고 본래 주인에게 돌려드리려는 믿음의 실재에는 내가 없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확신" 즉, 내가 먼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과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는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나의 노력'이 아닌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근본적인 진실은 "언제나 먼저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조, 구원,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에 개입하시는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먼저 움직이십니다. 우리의 믿음, 기도, 선행은 하느님의 이러한 선행적인 부르심과 은총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내가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시는 그분의 은총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바로잡을 때, 우리의 신앙은 교만과 자만심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 본래 주인에게 돌려드리려는 믿음의 실재에는 내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명, 재능, 시간, 심지어 우리가 이룬 신앙적 성취마저도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며, 그분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재능을 사용하고, 나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시간을 바칩니다. 이 과정에서 '나'라는 아집, 즉 스스로를 내세우고 증명하려는 거짓 자아는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만들어진 자아상'이 해체되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의 계획, 나의 의지, 나의 공로를 내세우던 자리에,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일하심이 채워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을 깊이 체험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 그분이심을 인정하며, 나의 삶을 온전히 그분께 돌려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영적 문제의 근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때 남는 것은 '나'라는 주어가 사라진 순수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이며, 이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가장 큰 자유와 기쁨일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노래
내가 쌓아 올린 나의 성(城)이 있었습니다. 선행의 벽돌을 나르고 기도의 창문을 내었으나 높아질수록 그림자만 길어지고 성벽 안엔 나 홀로 갇혀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 이름 붙인 거울 속엔 피곤한 얼굴의 우상이 앉아 칭찬의 제물을 기다리고,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내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굴레에 매여 신음하는 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께서 속삭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그 성을 짓기 전부터 나의 집에 있었다." 그 목소리에 나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거울에 금이 가고, 내가 애써 쥐고 있던 나의 것들이 본래 당신의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나의 믿음은 나의 결단이 아니었고 나의 사랑은 나의 힘이 아니었으며 나의 숨결마저 당신이 먼저 불어넣으신 생명의 메아리였습니다. '나'를 지우니 비로소 당신이 보이고 '나'를 비우니 당신의 사랑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