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오늘 축일을 지내는 필립보는 주님과 오랫동안 지냈는데도 주님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필립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내야 주님을 알 수 있는 것인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정체에 관해서 더 잘 몰랐을 것이고,
필립보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과 함께 일찍부터 메시아를 기다려왔기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 일찍부터 주님을 기다려왔고 더 알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주님은 유독 필립보에게 오랫동안 당신과 지냈으면서
아직도 당신을 모르느냐고 나무람 조의 추궁을 하실까요?
제 이해는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필립보를 나무란 것이 맞다면 다른 제자는 몰라도
너만은 나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나무라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 큰 믿음과 기대의 표시일 것입니다.
사실 더 믿기에 더 큰 기대를 하고 더 많이 기대하며,
더 믿기에 더 나무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화가 나서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더 깨우치고 분발케 하려고 나무라신 것이라면
다른 제자보다 그것이 가능한 제자에게 나무라신 것입니다.
나무라봤자 소용없는 제자는 내 입만 더러워지기에 나무라지도 않잖아요?
주님께서는 필립보를 깨우치기 위해서 사실 공을 많이 들이셨습니다.
어제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필립보를 꼬집어 시험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말하자면 주님께서 필립보를 시험에 들게 하신 것인데
다른 제자들을 놔두고 필립보에게 시험 문제를 내주신 것이 사랑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성숙하다면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더 시험에 들게 하고,
더 시험 문제를 풀게 하신 것이 사랑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질문과 시험과 나무람 등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깨우치시고,
필립보도 이에 질세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말씀드림으로써 또 나무라심을
듣고 또 깨우치고 하면서 주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뵙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오금박듯 말씀하시지만, 필립보는 ‘아닙니다, 저는 아직
주님을 모르고, 아버지도 뵙지 못했습니다. 뵙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이 과정,
아버지를 뵙게 되는 이 과정을 필립보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