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들의 문이다.”
서울의 지하철에는 역마다 다른 시詩가 있고,
철따라 다른 시가 걸립니다.
그래서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이번에는 어떤 시가 걸렸나,
이 역에는 어떤 시가 걸렸나를 보며
시를 감상하는 것이 저의 즐거움과 기쁨 중의 하나입니다.
며칠 전, 어느 역에서 이런 시를 감상했는데
너무 좋고, 저 혼자 보기에 아까워 적어 왔습니다.
박 공수라는 시인의 <창문>이라는 시인데 이러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벽을 허무는 게 아니다.
그 벽에 창을 내는 일이려니.
우리, 벽을 허물지는 말고
예쁜 창을 내도록 해요.
서로의 그리움이 통하다 보면
우리들 사랑도 싹트겠지요.
창으로 해서 벽은 더욱 신비해지고
벽으로 하여 창은 더욱 빛이 나네.
아름다운 창이 있어 당신의 벽도 존중합니다.
흔들림 없는 벽이 있기에 당신의 창문을 애타게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어제는 양들의 착한 목자라고 하시더니
오늘은 당신이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문이란 벽에 나 있지만 벽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벽이 없으면 문도 없지만 벽은 아닌 것이지요.
벽은 구분이고 차단이지만
문은 차단이면서도 소통입니다.
닫히면 차단이고 열리면 소통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건데 주님은 신비의 문입니다.
문이 없고 벽만 있다면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를 열고 닫는 문이며
우리가 하느님 나라와 우리 사는 세상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문입니다.
그런데 더 생각을 해보면 주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로 들어가는 문이고 그래서 구원의 문입니다.
저는 지금 성북동에 살고 있고 자주 성곽을 따라 거니는데
거닐며 느끼는 것이 성 밖인 성북동에 살고 있는 제가
성 안으로 들어가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에는 성벽이 있는데
우리가 구원의 장소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통행증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를 통해서 유추해본다면
통행증은 민족과 종교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유일한 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민족이건, 어떤 종교를 믿건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께서는 구별하지만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지만 다른 것 때문에 차등을 두지 않으시고
무엇보다도 구원에 있어서 차등을 두지 않으시고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케 하는 분이시지요.
오늘 저는 우리 모두 이런 성령의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문을 통과하게 되기를 갈망하며 기도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텃밭에도 부유한 집의 정원에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소외됨없이, 차별없이 내리는 것이
눈이고 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것이 이렇듯이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는 것을 보면, 하늘로 가는 문 역시 어느 누구도 소외됨없이,
차별이 없이 공평하게 열려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도는 자연에서 배우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문득 이런 시가 떠오릅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저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의 뒤를 따라가는 축복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