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우리 인생은 행불행의 인생입니다.
개에게는 행불행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입니다.
개는 우리 인간이 느끼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고,
개에게는 고통이 있을지언정 불행을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인간은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존재인데
아주 적극적으로 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아 불행한 사람도 있는데
제 생각에 많은 사람이 불행하지 않으니 행복하다는 식으로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행복한 종이 될 수 있는지 가르치시며
그 비결은 ‘깨어있음’이라고 가르치시는데 그 깨어있음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신께 깨어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도둑에게 깨어있음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당연히 행복을 주시는 분이고 도둑이란 행복 도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고자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깨어있지 않으면
도둑이 그 행복을 우리에게서 뺏어가기에 도둑에게도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도둑이 몇 시에 올지,
그러니까 몇 시에 행복을 뺏으러 올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가 압니다.
앞서 행복하지 않아 불행하다고 한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깨어있지 않을 때가 그때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에 깨어있지 않을 때가 그때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것을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해방의 날 밤이 조상들에게 예고되었다고 하며
예고된 것은 조상들이 어떠한 맹세들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용기를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지혜서는 또 얘기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주님의 행복 선언을 가지고 이해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지금 불행해 보이지만
실은 행복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 행복하게 된다고 예고하시고 약속하십니다.
문제는 이 예고와 약속을 믿느냐 그것인데
불신의 적들은 우리 안팎에 널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행복을 주신다는 약속은 허무맹랑하다고,
이 세상에서 행복해야지 하느님 나라 행복은 사기라고 하는 적들이
참으로 많으며 그것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는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이런 행복의 도둑들인 하느님의 적들을 깨부수심으로
주님께서는 행복을 되찾아 주시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깨부수시는 방법은 미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내치시는 방법이요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조건은 지혜서의 말씀대로 이 방법에 동의하는 것이고
히브리서가 말하듯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주님을 성실한 분으로 믿는 것이며,
복음서가 말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처럼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방법에 동의하시겠습니까?
행복 도둑을 경계하면서
행복 식탁에서 행복 시중을 드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