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열왕기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대비되고,
복음에서 큰사람과 작은 자가 대비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시작을 작은 자에서부터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일까?
바로 드는 생각은 자기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자기 안에 자기밖에 없는,
수용할 그릇이 작아 자기밖에 없는 자입니다.
남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리는 더더욱 없는 자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복음의 기쁨> 2항의 한 구절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고립의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헌이 얘기하는 ‘내적 생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누가 기도를 많이 하며 관상 기도라는 것도 하고,
요가나 마음 수련 또는 영신 수련을 열심히 하고,
좋은 강의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듣지만
그것이 다 마음 안에서 불안을 몰아내고 평안을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런 것들을 아무리 해도 그에게는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없고
고립 안에서 그리고 이기주의의 외로움 중에서 계속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알의 예언자들도 이런 자들에 속합니다.
그들이 기도를 처절하게 하고 황홀경에 들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하느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황홀경은 어떤 황홀경입니까?
마약으로 인한 황홀경과 무엇이 다릅니까?
부두교도들의 황홀경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기도한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심각한 경종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기도였는데
우리 기도는 하느님을 불러오는 데 실패한 바알 예언자들의 기도와 같지 않을까요?
나의 기도 안에 아예 하느님이 안 계시기에
마음의 평화는 있지만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기는 하지만
나의 독방에 주님을 모셔 들여 밀애를 나누면서,
이웃은 밀애 방해꾼으로나 여기고 밀쳐냄으로써
이웃을 위한 사랑의 자리가 없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밀쳐내고 하느님만 모셔 들이려고 하지만
사람을 밀쳐내면 내 안에서 하느님도 밀어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Deus Meus Omnia!’ 하며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모두시여! 라는 뜻도 되지만
나의 하느님, 모든 것이시여! 라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이시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것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아야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외하면 나는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지 못해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누구를 미워할지라도 미우면 미운 대로 품고 있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