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의 날이 있는데
굳이 프란치스칸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성인도 많다고 자랑삼는 축일이라면 참 유치한 축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사실은
제가 바로 자랑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삼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전혀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하셨습니다.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이 우리에게는 자랑하는 날이 아니라
성인들처럼 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는 날입니다.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는 사람은 이 축일을 지낼 자격이 없고
내가 프란치스칸입네 하고 얘기하지도 말 것입니다.
왜냐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자랑만 하는 것은
프란치스칸으로 살려고 하지 않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 이름으로 득만 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프란치스칸 이상을 얘기하면 외려
현실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우리는 물론 성인들처럼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지 못합니다.
진정 닮기를 원했고 닮으려고 노력하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지금까지보다는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미래가 있고 발전의 가능성이 있지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뻔뻔한 것일 뿐 아니라 미래가 없습니다.
그냥 내내 득이나 보고 덕이나 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쇄신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쇄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앞서는 것이지만
개인의 쇄신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이 축일을 같이 지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인은 홀로 성인이 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홀로 쇄신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있었기에 클라라가 있고,
클라라가 있었기에 프란치스코가 있음을 알고 있고
이 두 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성덕에 나아갔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처럼 정말 독하게 혼자 성덕을 이룬 성인들이라면 몰라도
거의 모든 성인은 같이 쇄신하고 같이 성덕을 이루어갔습니다.
이는 마치 한배를 탄 사람들과 같은 이치입니다.
배를 타면 나 혼자 갈 수 없고 내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같이 하느님께 가든지 같이 세속을 향해 가든지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같이 하느님께로 향해 가는지 돌아보고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면 쇄신을 같이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