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인간의 만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사랑은 신적 사랑의 만남과도 잇닿아 있습니다.
나의 지금 만남 중에 이런 만남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만남도 있습니다.
이 만남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같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분명 다릅니다.
사랑의 만남은 배타성을 띠지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은 배타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성 프란치스코가 그토록 싫어한 나환자와의 만남에 대해 그러했듯
싫어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회피하기 때문이지요.
나의 지금 만남 중에 이런 만남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끼리의 만남도 있습니다.
요즘 동호회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 역시 좋아하는 것이 같지 않을 경우 만남이 없으니
누가 이런 만남만 갖는다면 이 또한 배타성을 가질 겁니다.
나도 주로 이런 만남만 갖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아무튼 이런 만남들은 창조적이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겁고,
그래서 이런 만남 뒤에는 늘 얻는 것이 있으며
기뻐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슬퍼하는 사람끼리 만나도 슬픔이 줄어들 뿐 아니라 힘을 얻습니다.
그런가 하면 파괴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파괴적인 만남을 왜 가지는지 모르지만 인간이 참으로 묘한 것이
미워하면서도 만나고 만나면 서로 할퀴고 파괴하는데,
헤어지고 나면 또 다시 만나 할퀴고 파괴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증오도 사랑처럼 힘이고 힘이 있어야 미워도 할 뿐 아니라
미워하면서 우리 인간은 힘을 앗기기도 하지만 얻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고운 정뿐 아니라 미운 정이 드는 것이 이를 말하지요.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어떤 만남일까요?
한 마리로 얘기하면 행복한 여인들의 기쁜 만남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만남입니다.
인간적으로 서로 보고 싶어서 만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찬 여인들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만난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글라라 성녀의 전기 작가는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처음 만남을
두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이 서로를 이끌어 만나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인간적인 매력에 의해 만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만나기를 피하는 그런 인간적인 만남이 아니라
성령의 사랑에 이끌리는 사랑의 만남이라는 얘깁니다.
이런 만남은 주님 안에서 만나고 주님이 발생합니다.
우리도 오늘 이런 만남을 만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