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녀와 동정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삼손과 세례자 요한의 얘기입니다.
둘 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의 어머니를 보통 돌계집, 석녀라고 부르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라고 부릅니다.
아기를 낳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석녀와 동정녀가 같지만
그 뜻은 분명 사뭇 다릅니다.
석녀는 출산과 관련하여 생물학적인 불능의 존재이고,
동정녀는 자발적이고 성사적인 불능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자발적이고 성사적인 불능을 봉헌된 동정이라고도 합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낳기 위해 스스로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그 검사 중의 하나가 남성 검사입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한 남자인지 검사를 받는 것인데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한 남자만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돌사나이>는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기를 낳을 수 없어서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아기를 낳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위해
자기 아기를 봉헌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히 얘기한다면 하느님을 낳기 위해 자기 아이를 낳지 않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삼손과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는
봉헌된 동정녀들이 아니라 그저 돌계집일 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아이를 가질 수는 없었지만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아이를 낳게 된 여인들이며,
자기를 위해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들이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이를 낳게 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는 돌계집도 못되고 동정녀도 못 되기 쉽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시집을 안 간 것도 아니고
아기는 펑펑 잘도 낳는데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낳은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내 아이를 낳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고 제 얘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많기에 참으로 많은 것을 하지만
그 한 것들이 다 자기 성취를 위한 것이기 십상입니다.
많은 경우 제가 하는 것들이란
하느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느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봅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가 될 수 있다면 더 좋고,
영적인 의미에서 제가 돌계집이라도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내 스스로는 아무 것도 낳을 수 없는 불능의 존재 말입니다.
하여 내가 못하기에 하느님께서 하시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