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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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7,16)
저의 불신앙을 고쳐 주십시오
성경은 이 사람의 믿음이 매우 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사실을 알려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그 사람이 주님께 다가와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외주십시오(마르 9,24) 하고 말한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귀에게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고 명령하신 것과 그 남자가 그리스도께 “하실 수 있으면"(마르 9,22)이라고 한 것에서도 그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사람이 믿지 않아서 마귀가 아이에게서 나가지 않은 것이라면, 어째서 그 남자는 제자들을 비난하는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남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니고서 환자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오지 않은 경우에도 제자들이 환자를 치유한 적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치유를 행하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환자를 데려오는 사람의 신앙만으로도 치유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환자를 데려오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일 때도 사목자의 덕만으로도 기적이 얼마든지 일어났기 때
문입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경우를 다 보여 줍니다. 코르넬리우스 주변의 사람들은 신앙을 지녔던 까닭에 성령의 권능을 자신들에게 끌어당겼습니다. 엘리사 시대에는 신앙을 지닌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습니다(2열왕 13,21 참조).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돌파는 지성의 돌파, 우리네 의식에서 얼어나는 돌파, 상(像)을 만들어 내는 영역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이것을 실증하기 위해 성서에서 우리네 의식의 변모를 다룬 부분을 끌어댄다. 그는 바오로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혼과 하느님이 하나의 상으로 변모되었기에, 영혼도 하느님을 마주 보고, 하느님도 영혼을 마주 본다." 엑카르트가 인용한 바오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분과 같은 모상으로 모습이 바뀔 것이니,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모습이 바뀔 것입니다”(2코린 3,18). 돌파야말로 우리가 다른 상으로 변모되는 순간이며, 신성한 순간이다. 돌파속에서 우리는 신성 속으로 침투한다. 우리는 영원 전부터 신성 속으로 들어가도록 초대를 받았다. 돌파 속에서 우리는 피조물과 창조주를 넘어 이름 없는 하느님, 곧 신성으로 나아간다. 돌파 속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선과 창조주의 선 배후에 있는 “정수” “핵" “뿌리” “줄기”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혹자는 우리가 선의 바탕이 되는 선, 신비의 바탕이 되는 신비, 하느님의 바탕이 되는 하느님을 건드린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돌파를 통해 신성하게 태어난다. 돌파는 우리 자신의 신적인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신적인 방법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하느님이 새로이 태어날 수 있는 바탕이기도 하다.(443)


<금주간 성서읽기> 1베드 3-5장 / 2베드 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구체적인 물체는 특정한 빛의 파장만 반사하고 나머지 파장은 모두 흡수하듯이, 개별 종교도 그 전통이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깊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흔히 기독교는 인격신을 믿는 타력 구원의 종교이고, 불교는 다르마를 깨닫는 자력 구원의 종교라고 단순하게 비교하지만, 이런 평면적인 대조는 넘어서야 한다.
더 중요한 건, 어떤 종교의 고유한 특성을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신앙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태도는 잘못된 접근이다.
‘구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체험은 각 종교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지개 색깔 중 하나인 빨간색이 보라색을 향해 “넌 색깔도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장미꽃이 국화에게 “넌 나보다 예쁘지도 않고, 꽃도 아닌 잡초야”라고 말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장미는 장미대로 아름답고, 국화는 국화대로 품위가 있다. 둘 다 꽃으로서 고유한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파니카의 ‘무지개 모델’은 이런 걸 보여준다. 각 종교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 특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논의는 이런 다양성과 고유함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