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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세 번째 이야기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형제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돌아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대신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새것을 쉽게 구입하기보다 오래 사용하며, 버리기 전에 나누고 고쳐 쓰는 길을 선택합니다. 편리함만을 기준으로 결정하지 않고 그 선택이 다른 생명과 공동의 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습니다. 생태적 회심은 거대한 환경 정책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매일의 식탁과 방과 이동과 소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먹을 만큼만 준비하고, 물을 소중히 사용하며, 쓰레기를 줄이고, 지역의 생명과 땅을 돌보는 작은 행동들이 창조 세계와 맺는 형제성입니다.

 

프란치스코의 피조물 찬가는 아름다운 시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소유가 아니라 친교로 바라보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태양을 형제라 부르면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태워도 되는 에너지원으로만 생각할 수 없고, 물을 자매라 부르면서 오염시키거나 낭비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신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음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의 고통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먼저 닿습니다. 물과 땅을 잃은 사람들,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이들, 변화에 대처할 자원이 없는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습니다.

 

생태적 정의는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이며, 가난한 이와의 연대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동의 집을 지키는 일은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갈 권리를 지키는 보편적 형제성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자리에서는 우리의 말이 자주 가벼워집니다. 우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의미를 붙이며, 빨리 희망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깊은 상실과 아픔 앞에서 설명은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아픔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함께 머무는 사람입니다. 울고 있는 이에게 눈물을 그치라고 재촉하지 않고, 슬픔의 시간을 존중하며, 아무런 답이 없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세상 속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멀리서 설명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눈물을 즉시 없애 주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버림받음과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 그곳을 당신의 현존으로 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은 고통받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답을 쉽게 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여기 함께 있다.”는 몸의 언어를 건넵니다.

 

함께 있음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혼자 지지 않도록 나누는 것이며, 세상과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임마누엘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교회와 공동체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집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당의 문을 열어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을 나서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로 가야 하고, 병원과 시장과 일터와 거리와 외로운 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교회 안으로 데려오는 일만이 아니라 교회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스승으로만 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배우는 제자가 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작고 열린 집이었습니다. 지친 이가 들어와 쉴 수 있고, 죄인이 자비를 구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형제들이 기도한 뒤 다시 세상으로 파견되는 집이었습니다.

 

오늘의 공동체도 포르치운쿨라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상처와 실패를 숨기지 않고 들어올 수 있으며,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앙에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배제되지 않으며, 사회가 붙인 낙인보다 더 깊은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안전한 집이 되려면 먼저 우리 안의 문턱을 낮추어야 합니다. 사람의 옷차림과 학력과 경제적 능력과 신앙의 정도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경계하며 거리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환대는 미소로 맞아들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가 정해 놓은 방식에 일방적으로 맞추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그의 문화와 경험과 상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환대는 상대방을 우리와 같게 만드는 동화가 아니라, 다름을 지닌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은 공동체에 적응해야 할 대상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더 넓고 깊게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간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과 방식을 세상에 강요하려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우리의 질서를 받아들일 때만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복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에서 새롭게 일하시도록 공간을 여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이 없는 곳에 하느님을 가져가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의 삶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삶을 통하여 복음을 새롭게 배웁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에서 나눔을 배우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경건함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며,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정의와 자비의 실천 안에서도 성령의 숨결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경계보다 넓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교회 밖에서도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의 씨앗을 키우십니다. 작은 형제는 그 씨앗을 짓밟지 않고, 겸손히 알아보며 기뻐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방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고통 속으로 깊이 들어가되 권력과 경쟁과 소유의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영향력을 얻기 위하여 더 강해지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더 작아지라고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라고 하지만 복음은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라고 합니다. 세상은 승리하고 지배하라고 하지만 복음은 섬기고 발을 씻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 있는 프란치스칸은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규모와 숫자와 명성과 효율만으로 자신의 사명을 평가하지 않고, 관계 안에 얼마나 생명이 살아났는지, 약한 이의 존엄이 얼마나 존중받았는지, 평화와 화해가 얼마나 자라났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모았으나 한 사람의 상처를 외면했다면 그것은 복음적 성공이 아닙니다. 큰 건물을 세웠으나 가난한 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면 그것은 포르치운쿨라의 길이 아닙니다. 많은 사업을 이루었으나 형제들이 지치고 관계가 무너졌다면 우리는 목적을 위하여 사람을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매는 수치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사람의 회복, 오래 단절되었던 관계의 작은 대화, 병든 이가 존엄하게 돌봄을 받은 시간, 한 젊은이가 자신의 질문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게 된 변화가 하느님 나라의 귀한 열매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과를 하느님께 맡기는 가난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그 결과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주었으나 상대가 변하지 않을 수도 있고, 평화를 위하여 노력했지만 갈등이 계속될 수도 있으며, 정의를 외쳤으나 구조가 쉽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낙심하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선은 즉각적인 결과로만 판단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의 눈에 실패처럼 보였지만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행한 작은 선은 보이지 않는 곳에 남습니다. 한 사람에게 건넨 존중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뒤에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우리가 보여 준 용서는 또 다른 관계에서 용서할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어떤 씨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뿌린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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