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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첫 번째 이야기

 

포르치운쿨라에서 세상의 상처로 파견되는 작은 형제들

포르치운쿨라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어 있기 위하여 세워진 작은 성당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세상 한가운데로 다시 나아가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고, 복음을 듣고, 형제들과 한 몸을 이루는 파견의 집이었습니다. 형제들은 포르치운쿨라에 머물렀지만 그곳을 소유하지 않았고, 그 작은 성당 안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았지만 그 위로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간직하지 않았으며, 기도 안에서 평화를 맛보았지만 그 평화를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맨발로 먼지를 밟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마을과 도시와 들판을 지나며, 사람들의 집과 시장과 병든 이들의 자리와 전쟁의 경계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도 없었고, 권력자의 허가도 없었으며,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것은 복음과 형제, 그리고 하느님께서 먼저 세상 안에 계신다는 믿음뿐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세상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떠나야 할 어두운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이미 몸을 취하여 들어오신 자리였고,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와 병든 이와 죄인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자리였으며, 성령께서 여전히 모든 피조물 안에서 새 생명을 일으키시는 거룩한 현장이었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설명하는 말씀만 보내지 않으셨고, 높은 곳에서 인간에게 올라오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취하셨고, 인간의 눈물과 피로와 배고픔과 외로움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우리와 같은 길을 걸으시고 우리와 같은 흙을 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칸에게 선택 가능한 활동이 아니라 육화의 신비를 따르는 복음적 필연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피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세상을 피할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셨다면 우리도 다른 이의 고통 앞에서 멀리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더 깊이 보게 합니다. 참된 관상은 눈을 감아 현실을 잊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열어 구체적인 실재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사람들의 울음에 더 민감해지고, 피조물의 신음에 더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불의와 폭력 앞에서 더 깊이 아파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위로에 머무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관상이 가난한 이의 울음과 연결되지 못하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직 복음적 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성이 세상을 판단하는 높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상처 입은 사람 곁으로 내려가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육화되지 않은 영성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세상 속에서 그분을 다시 알아보았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라보시던 그리스도는 나병 환자의 일그러진 얼굴 안에서도 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성체 안에서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는 그리스도는 굶주린 사람의 빈손 안에서도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말씀 안에서 평화를 선포하신 그리스도는 전쟁과 적대의 경계에서 화해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세상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바로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었고, 길가에 버려진 병자의 몸이었으며, 성벽 밖으로 밀려난 가난한 이의 삶이었습니다. 세상은 전쟁으로 서로를 원수라 부르는 두 집단이었고, 소유와 명예를 위하여 형제를 경쟁자로 만드는 인간의 마음이었으며, 탐욕으로 상처 입은 땅과 물과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구체적인 얼굴을 향합니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곁의 한 사람을 피할 수 없고,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내 공동체 안의 오래된 적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가까운 형제의 필요에는 무관심할 수 없고, 피조물의 보호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소비와 편리함은 조금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네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누구의 울음을 듣고도 지나쳤느냐? 누구의 상처가 네 계획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외면되었느냐? 어떤 생명이 네 편리함을 위하여 희생되고 있느냐? 어떤 관계가 네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무너지고 있느냐? 다시 세상 속으로 간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다만 그분의 사랑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작은 도구입니다.

 

도구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거나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도구적 존재란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착각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선하심이 나를 통하여 관계 안으로 흘러가도록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입이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말의 도구가 아니라 위로와 진실의 도구가 되고, 나의 귀가 소문과 판단을 모으는 도구가 아니라 말할 곳 없는 이의 이야기를 듣는 도구가 되며, 나의 손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손이 아니라 굶주린 이에게 빵을 건네고 병든 이의 몸을 씻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발이 불편한 사람을 피해 가는 발이 아니라 외로운 이를 찾아가는 발이 되고, 나의 시간과 능력과 공간이 나만을 보호하는 성벽이 아니라 다른 이가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포르치운쿨라가 되는 것입니다.

 

도구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용하시는 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 말해야 할지, 언제 침묵해야 할지를 묻습니다. 때로 사랑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지만, 때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불의 앞에서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때로는 말보다 현존으로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참된 섬김은 내가 하고 싶은 선행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존엄과 선택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다는 이름으로 그를 나의 선행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지혜와 힘과 고유한 이야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봉사하지 않고, 자신이 옳은 편에 서 있다는 만족을 얻기 위하여 약한 이들의 고통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미 그 사람의 삶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조심스럽게 곁에 섭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를 자신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어 주는 사람으로만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곁으로 내려가 형제가 되었고, 그들의 삶 안에서 자신이 받아야 할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프란치스코에게 자선을 베풀 대상이기 전에 회심으로 이끄는 스승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를 껴안으면서 그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역겹게 보이던 것이 달콤함으로 바뀌었고, 피하고 싶었던 얼굴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해 다가가지만 그들에게서 가난의 지혜를 배우고, 아픈 이를 위로하기 위해 곁에 머물지만 그들의 인내를 통하여 삶의 깊이를 배우며, 소외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는지를 깨닫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무엇을 주기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수많은 얼굴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눈을 열며, 우리의 거짓 자아를 깨뜨리시는 계시의 자리입니다. 낯선 사람은 우리에게 새로운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 주고, 상처 입은 피조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절제와 돌봄을 가르치며, 가난한 이의 빈손은 우리가 무엇을 움켜쥐고 살아왔는지를 드러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안전한 해석과 익숙한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의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고, 우리가 준비한 답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마주하며, 무엇이 옳은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을 몇 가지 원칙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선한 의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배웁니다. 사람의 상처는 깊고, 사회의 불의는 복잡하며, 오랜 시간 쌓인 분열은 한 번의 말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의 작은 형제는 모든 답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듣고, 배우며, 사람들과 함께 길을 찾습니다. 자신이 구원자라는 교만을 내려놓고, 이미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발자취를 발견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그곳에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상호 돌봄 안에 계시고, 전쟁 중에도 자녀를 지키는 어머니의 손 안에 계시며, 불의에 맞서면서도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용기 안에 계십니다. 상처 입은 땅을 다시 살리려는 작은 노력과,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문을 여는 공동체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선하심은 이미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곳에 하느님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일에 우리의 작은 몫을 보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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