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2,38-42
사람들은 ‘표징’을 보여 달라 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구경거리 같은 표징을 거절하시고,
오직 ‘요나의 표징’만을 약속하십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을 ‘영적인 눈’으로 읽어 낸 교부입니다.
그는 ‘요나의 표징’에서
곧바로 그리스도를 봅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 나왔듯,
사람의 아들도 사흘 동안 땅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십니다.
가장 깊은 표징은
눈을 현혹하는 기적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표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믿고 듣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니네베 사람들과 남방 여왕을 들어 보이십니다.
거대한 도시 니네베는
요나의 짧은 ‘설교’를 듣고 통째로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 땅끝에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표징을 구하지 않고
‘말씀’과 ‘지혜’에 귀 기울인 이들입니다.
오리게네스는 말합니다.
이방인인 그들이 말씀에 귀 기울였는데,
정작 말씀이신 분을 곁에 둔 우리가
귀를 닫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거룩한 독서의 관점에서 보면
이 복음은 분명합니다.
믿음은 표징을 손에 쥐는 데서가 아니라,
말씀에 귀 기울이는 데서 자랍니다.
“여기에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있다.”
그 ‘더 큰 이’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며,
거룩한 독서는
그분을 성경 한 줄 한 줄에서 만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믿음의 근거로 ‘눈에 보이는 표징’만 찾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니네베처럼 말씀 한마디에 돌아설 줄 아는가?
나는 남방 여왕처럼 ‘지혜’를 갈망하는가?
나는 성경에서 ‘요나보다 더 큰 분’을 만나고 있는가?
주님,
눈에 보이는 표징만 좇지 않게 하소서.
니네베처럼 말씀 한마디에 돌아서게 하시고,
성경 한 줄에서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