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승천 대축일 묵상
땅끝까지 흐르는 사랑의 증언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사명을 부여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다시 세상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게 만드는 하느님의 숨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스승을 잃은 상실감, 실패감,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문을 닫고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리시는 순간, 닫혀 있던 문보다 더 굳게 잠겨 있던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단순한 위로의 감정이 아닙니다. 무너진 존재 안에 다시 생명의 방향을 세우시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 힘은 사람을 지배하거나 과시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순간에 용서하게 하고, 포기하고 싶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내게 하며, 상처 입은 채로도 다시 타인에게 마음을 열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권력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인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논리만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태도와 표정, 말의 온기와 행동의 깊이를 통하여 세상 안으로 스며듭니다. 어떤 이는 긴 세월 묵묵히 밥을 짓고, 누군가는 아픈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며, 누군가는 자신의 욕심보다 공동체의 평화를 먼저 선택합니다. 바로 그런 삶 안에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 표현은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닙니다. 사랑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영적 여정입니다. 예루살렘은 익숙한 자리입니다. 가족과 공동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유다는 조금 더 넓어진 삶의 자리입니다. 관계를 맺고 책임을 배우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유다인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리던 곳, 편견과 갈등의 벽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복음은 바로 그 경계를 넘어가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안전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게 하고, 미워했던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하며, 상처와 편견으로 갈라진 세상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땅끝까지.” 그 땅끝은 단순히 먼 나라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의 마음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외면해 온 내 자신의 상처일 수도 있으며, 사랑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고 포기했던 절망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바로 그 땅끝까지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다시 생명이 시작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령의 힘을 거창한 기적보다 삶의 단순함 안에서 드러냈습니다. 가난한 이를 형제로 부르고, 버려진 존재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며,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사랑의 흐름 안에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참된 증언은 큰 소리를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 삶 자체가 누군가에게 희망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 안에 조용히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는 무엇으로 세상을 살리고 있느냐.” 분노가 넘치는 세상 속에서 온유함으로 살아가는 사람,경쟁이 지배하는 자리에서 함께 살아갈 길을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땅끝까지 복음을 살아내는 성령의 증인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분의 약속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심장과도 같은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강조하시는 것은 “가르쳐라” 이전에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처음에는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지치고, 상처받으면 마음을 닫고, 실패를 경험하면 다시 움츠러듭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고, 십자가 앞에서는 침묵했고, 부활의 소식조차 쉽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은 준비된 사람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사람을 당신 사랑으로 준비시키십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우월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가르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먼저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의 흐름 안으로 다른 이를 초대하는 일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여기에는 경계 없는 사랑의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민족과 언어, 문화와 역사, 심지어 서로 다른 상처와 삶의 방식까지 넘어서는 보편적 사랑의 초대입니다.
복음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상처 입은 사람도, 길을 잃은 사람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를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는 단순한 종교적 절차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속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더 이상 자기 욕망과 두려움만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끊임없이 사랑을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이 세상 안에 흐르도록 이어주십니다. 세례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 삼위일체적 사랑의 흐름 안에 내 삶을 담그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소유보다 나눔을 배우고, 지배보다 섬김을 배우며, 경쟁보다 관계를 선택하는 삶. 예수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지식을 전달하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복음은 머리로 이해되는 진리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야 비로소 완성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배우는 것은 용서에 대한 강의를 듣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아픈 관계 안에서 다시 손을 내미는 데 있습니다. 사랑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작은 선택들이 쌓일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이 무엇인지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언제나 복음을 선포하라. 필요하다면 말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복음화는 말 이전에 존재의 향기입니다. 누군가를 존중하는 눈빛, 욕심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 가난한 이 곁에 오래 머물러 주는 인내, 그리고 상처 입고도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삶. 그 삶 자체가 이미 세상을 향한 복음의 언어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약속이야말로 모든 사명의 뿌리이며 힘입니다. 우리가 혼자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함께 걸어가시는 분의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는 작은 도구일 뿐입니다. 때로는 지치고 흔들리더라도, 사랑이 불가능해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보다 먼저 세상 속으로 들어가 계시는 그분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지금도 너와 함께 걷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