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불교에 아주 큰 매력을 과거에 느꼈고,
지금도 느끼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넓은 포용력입니다.
그런데 그 포용력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들이
분별심을 지극히 경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사상은 나누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요.
가장 대표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성과 속을 나누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나눕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대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다시 말해서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고 합니다.
정반대되는 것이고 생각되는 색과 공이
다른 것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고(不二) 합니다.
그래서 웃자고 하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식당에 갔더니 직원이 바닥을 닦던 걸레로 식탁을 닦더랍니다.
그래서 도를 닦고 있었지만 더러운 것을 극히 싫어하던 사람이
직원에게 그것을 따지니 그 직원이 하는 말이
당신은 아직도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구별하느냐고 하더랍니다.
자기는 도를 닦는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분별심을 가지고 있는데
인도에서는 식당 직원조차도 분별을 하지 않는 경지에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깨끗하다고 하는 것도 더 깨끗한 것에 비교하면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것을 극도로 추구하면 깨끗한데도 더럽다고 할 것이고,
그 더러운 것 때문에 괴로울 것이고 괴로워하는 자신 때문에 또 번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초월하는 사람이 돼야 행복하고
초월한 사람이 되어야 초월이신 하느님도 만납니다.
성령은 각기 다른 은사와 다름의 은사를 주시지만
동시에 각기 다른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시고
사랑도 그렇습니다.
너와 나 다르지만 달라도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너와 나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한 분이시지만 삼위이시고,
삼위를 가지고 계시나 한 분이신데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더럽고 속된 음식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런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과는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응대하는 것을 보고 오늘 저는 이런 묵상을 하였고 나눔도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불교 얘기를 하다 보니 이런 선문답 같은 나눔을 하였는데
불쾌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잘 이해해주시기를 바라는 오늘 저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