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교롭게도 라베르나에서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주님의 수난과 프란치스코의 오상을 연결하여 묵상케 되고,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수난을 사랑하는지 성찰과 반성도 하게 됩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과 만남 이후 주님의 수난을 늘 생각하며
프란치스코는 거리를 한숨과 눈물로 채웠다고 첼라노 전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대한 애처로움이 그의 거룩한 영혼에 뿌리를 내렸고, 아직 살에는 찍히지 않았지만 경의로운 오상이 그의 마음속 깊이 찍혔음을 경건히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자기 눈앞에 언제나 어른거리는 듯 그리스도의 수난을 큰 소리로 외치고 슬퍼하며 울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기억하느라 길거리를 한숨으로 채웠다.”
그런 그였기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특별히 지냈는데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은둔소에서 이 축일을 지낼 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는 두 가지 소원을 들어주십사고 주님께 청합니다.
하나는 할 수 있는 한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큰 고통을 겪으셨는지
할 수 있는 한 그 사랑을 똑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사랑,
이 두 개가 합쳐진 것이 Passio입니다.
Passio는 보통 수난이라고 번역되고 Passio Christi를 그리스도의 수난이라 하지만
그 수난이 억지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일 때는 그것을 Passio라고 하지는 않고
사랑으로 받아들인 고통 또는 고통을 무릅쓴 사랑을 뜻할 때 Passio라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억지로 고통을 받습니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으며
달게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어 억지로 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달콤한 연애편지는 기다렸다가 기쁘게 받아 간직하지만
쪼들리는 살림에 세금 고지서는 받긴 하지만 내치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통은 사랑만큼 달게 받아들이고
사랑이 없으면 요만큼의 고통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견디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려면 고통도 무릅쓸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지닐 수 있고 지니게 되느냐 그것이 관건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발심(發心)이나 초발심(初發心)인데
말하자면 고통을 사랑할 마음을 의지적으로 일으키는 것입니다.
‘고통’ 하면 무조건 도망부터 치는 것이 어리석고 미성숙함인데
지혜롭고 성숙하면 고통을 피하지 않고 사랑키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심하여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면
거기서 서서히 고통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자랍니다.
저는 사랑이 자란다고 했습니다.
발심에 의해 발아한 수난의 사랑(Passio)이 견디는 동안 자라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도 처음에는 나환자를 두려워했고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나환자를 만나게 됐을 때
마냥 그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나환자를 껴안기로 발심과 결심을 합니다.
물론 발심과 결심만 하지 않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 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셔서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생겼고,
껴안았을 때부터 그 쓰디쓴 맛은 단맛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거듭거듭 수난의 사랑을 실천했을 때 주님처럼 되고 싶었고 오상을 받았습니다.
수난 주일에 프란치스코가 오상 받은 라베르나에서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두 가지 소원을 들어주십사고 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발심하고 결심하고 기도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