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0,31–42
사람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합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많은 좋은 일을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그들은 대답합니다.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신성 모독 때문이다.
당신이 사람이면서 하느님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들의 기준을 흔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으면 나를 믿지 마라.
그러나 내가 한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들은 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피하시고,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믿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행하지 않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참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에서 인간의 비극을 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좋은 일”을 보면서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그 선조차 위협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진리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교만으로 굳어 있으면
빛이 와도 눈이 아픕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예수님의 신성은 철학적 주장만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살리는 손길을
자기 권위와 체계를 흔드는 위협으로 봅니다.
그래서 돌을 듭니다.
오늘 영성 주간의 복음은
우리에게 정확히 묻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선을 보며
더 부드러워지는가,
아니면 더 단단해지는가?
나는 생명을 살리는 일 앞에서
기뻐하는가,
아니면 내 기준이 흔들릴까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내가 한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말로 이기려 하지 않으시고,
삶으로 드러내십니다.
오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성인의 날과 함께
복음은 우리를 이렇게 부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돌을 드는 손 대신
살리는 손으로,
단죄하는 눈 대신
자비의 눈으로.
주님,
제 마음이 교만으로 굳어
당신의 선마저 위협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제가 돌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