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의 주님께서는 같은 운명이고,
반대자와 음모꾼들에 의해서 이내 죽게 되는 운명입니다.
그런데 왜 죽게 되느냐 하면 둘 다 하느님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이기 때문에,
곧 하느님을 대신해 세상에 쓴소리하라고 파견된 예언자이기 때문이고,
주님께서는 신성모독자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한 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좋은 일만 했는데 왜 죽이려느냐는 주님 말씀에
그들은 이렇게 분명하게 죽이려는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당신이 신성모독하는 것이 아니라고,
곧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자부한다고 반박하십니다.
자처와 자부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자처는 남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자부는 내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처는 너는 신이 아닌데 그래서 우리는 네가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자기를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남이 지적하는 거라면
자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하느님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당신을 신으로 자부하시고 우리도 그 자부심을 지니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그 자부하는 것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하며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이 될 수 있고 신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다 신이라는 말씀이고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 나는 신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결단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성모독입니다.
제가 사랑으로 뭔 말을 했는데 누가 그 말을 무시하고 묵살하면
그게 저에 대한 모욕이요 모독이듯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 우리에게 오시어 말을 건네셨다는 것은
우리를 당신 대화 상대자로 삼으신 것이고 우리를 신분 상승케 하신 겁니다.
우리 가운데는 강아지한테는 말을 걸면서 사람한테는 오히려 말을 걸지 않음으로써 같은 사람인데도 개무시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대화 상대자로 삼으신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랑이요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은혜에 우리가 배은망덕하면 되겠습니까?
말은 건네시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건네시며 네가 내 말은 들으면 신이라고 하시는데도
신이라는 정체성은 싫다며 거부한다면 이것은 배은망덕이요 나의 불행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개처럼 살겠습니까?
신처럼 살겠습니까?
이제 이웃을
개로 만들겠습니까?
신으로 만들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