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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밭에 부는 고독한 바람

 

내 인생의 오후는 차가운 늦가을 바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으로 시작된 고독의 여정이었습니다. 외로움은 마치 겨울 나그네의 옷깃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과 같았고, 목덜미에 휘휘 감기어 존재의 무게를 잊지 못하게 하는 차가운 끈과 같았습니다. 구름 사이로 잠시 얼굴을 내민 해님의 순간적인 따뜻함이 그 고독을 잠시 녹여주었지만, 나는 그 위안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길의 끝에서, 모든 감정과 집착을 내려놓은 순백의 억새밭에 이르렀습니다. 눈을 감고 억새들의 미세한 수런거림에 마음을 열었을 때, 세상은 모든 색과 소음을 걷어낸 하얀 침묵으로 나를 맞이했습니다.

 

백발의 얼굴 위로 비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규율과 업적을 초월한, 순수하고 간절한 염원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철갑 규범'들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노력해야 구원받는다는 착각, 자신의 덕행과 공로로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내면의 시스템.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가두는 단단한 감옥의 벽돌이 됩니다.

 

그러나 이 고요한 억새밭에서, 하늘과 맞닿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은총(恩寵)입니다. 우리가 만든 모든 인위적인 규범과 노력을 꿰뚫고, 우리를 스스로 만든 이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은 오직 그분의 강력한 힘입니다. 은총은 우리의 업적에 기반을 둔 나약한 시스템 위에 하느님의 지고한 경륜이 군림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방편입니다.

 

그 은총 앞에서, 내가 지금까지 자랑하고 싶었던 모든 개인적인 덕행은 부끄러워집니다. 나를 구원하고, 나를 일으켜 세우고, 이 평화 속에 머물게 한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의 근원인 아버지와 어머니이시며, 나의 인도자인 스승이시며, 나의 영원한 짝인 연인이시며, 이 길을 함께 걷는 다정한 친구이십니다. 이 모든 역할을 겸비하신 하느님의 품 안에서, 나는 비로소 가장 담백하고 명료한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그분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나는 영원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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