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거저 주어진 선물
우리는 종종 업적과 공로에 근거하지 않은 은총, 곧 우리의 내면을 무장 해제시키는 은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은총은 아버지의 자비롭고 따스한 손길을 체험하게 하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고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거저 주어지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은총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는 하느님의 강력한 힘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여는 비밀의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결과를 노력의 대가로 보겠지만, 은총은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비롯된 무상의 선물이며, 인간은 이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조가 선물이고, 우리의 삶은 위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골로 1,16–17)
은총은 우리의 덕행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것은 펠라기우스의 자력구원이나 얀센주의의 완전주의처럼 선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업적과 공로를 의지하려는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은총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가난하고 텅 비며 쓸모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은총을 누가 기꺼이 원하겠습니까?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이들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몇몇 사람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바리사이는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의하거나 간음하지 않으며,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9–14)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서 실존의 진실을 인정할 때, 그 은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겸손의 바탕 위에서 성령의 활동은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내 것이라 할 만한 것은 오직 악습과 죄뿐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 곧 은총입니다.
우리는 모두 은총의 협력자, 곧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선을 이루시며,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해 세상에 사랑을 전하십니다. 선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와, 우리를 통해 서로에게 전해집니다. 우리가 말씀을 품고 관계 안에서 선을 낳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의 살아 있는 체험, 곧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