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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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7일 연중 제 23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란 통상적으로 자기 스스로 한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그와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서적 전승의 발전으로써 후기 유다 사상에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안에서도 이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단어는 예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지혜의 원천이기 때문에 제자의 이상은 한 인간을 스승으로 따르는데 있지 않고 하느님 자신의 제자가 되는 데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모세(요한 9,28), 세례자 요한(참조: 마르 2,18; 요한 1,35; 사도 19,1-3) 그리고 바리사이 사람들(마태 22,16)의 제자들에 관해 몇가지 언급을 빼놓고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스승으로 인정한 사람들에 한정하여 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열두 사도들을 제자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특히 주님께서 선교하도록 파견한 72인을 제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루가 10,1). 아마도 이러한 제자들은 많이 있었지만(루가 6,17; 19,37; 요한 6,60),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요한 6,66).
이처럼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그렿게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적인 소질이나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께서 먼저 택하시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가 되기 위해서 특별히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첫번째 요인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과거의 집착들을 끊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참된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과거와 결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말과 행동을 본받고 그분의 교훈을 깊이 새겨 들으며 그분의 삶에 자기의 삶을 일치시키는 철저한 자기 버림을 의미합니다. 유다교 학자의 제자들은 일단 율법에 규정된 교육을 끝낸 다음에는 스승을 떠나 독자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으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과는 달리 하나의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의 전인적 인격을 본받고자 했기에 자기 부모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스승을 온전히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우리들의 스승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을 감추어 둔 생명의 책과 같습니다. 영원한 기원과 부패하지 않는 본질, 생명을 주는 지식과 지워 질 수 없는 글씨를 가진 이 책을 찾아 내야 합니다. 이책을 연구함도 바람직하고 이책의 가르침은 쉬우며 그 지식은 감미롭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말씨는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이 책을 찾아내는 이는 그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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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1-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1. 현존 (Presence)
완덕(完德)의 가르침
사랑은 사랑받는 이가 굴욕이나 위축됨을 느끼지 않도록 그의 수준으로 내려온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낮아짐, 겸손의 예는 성체성사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과 인성의 모든 위대함을 가리시고, 겸손하고 평범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에 현존하신다. 만일 그분께서 타보르 산에서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가까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성체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사랑은 또한 모든 것을 인내한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과 신성을 믿지 않는 이들, 중죄 상태에 있는 이들, 당신께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 심지어 고의적으로 성사를 모독하는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스스로를 내어주신다. 그분께서 이렇게 허용하시는 것은, 우리 각자의 자유로운 사랑의 응답을 최대한 존중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불성실할지라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겸손과 자기희생, 가난의 완전한 모범이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 안에서, 베들레헴이나 갈바리아에서보다 더 깊이 자신을 낮추신다. 베들레헴과 갈바리아에서는 당신의 신성을 가리시고, 인간의 나약하고 고통받는 모습으로만 드러내셨다. 그러나 성체성사 안에서는,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마저도 빵과 포도주의 겉모습 아래에 감추신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양뿐만 아니라, 당신 거룩한 인성의 아름다움조차도 포기하신다. 이는 곧 가난의 극치이며, 갈바리아에서처럼 모든 소유를 버리신 것을 넘어, 이제는 인간의 형상마저도 버리신 것이다.(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