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의외로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잘못 사랑하다가 결과적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초월하여 너를 사랑할 줄 알 때 진정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너를 사랑할지라도 너만을 사랑하면 너를 진정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연인들이 사랑할 때 너만을 사랑한다고 사랑 고백을 하는데
물론 그래야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너만 사랑하는 동시에 너만 사랑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너를 초월할 수 있는데도 너만 사랑해야 진정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자기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인 것처럼
너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참사랑이 되려면 어디에 갇혀선 안 되고,
나든 너든 우리나라든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도 봐야 합니다.
저는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기에
즈카르야 노래를 바칠 때마다 어느 정도 거부감이 아직 있습니다.
“주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찌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십니까?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라면 천부당만부당입니다.
그러므로 즈카르야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나
오늘 마태오복음의 족보 이야기는 초월적인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으로 곧 내재적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의 장소가 왜 우리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냐?
그 족보가 왜 저의 안동 김가 족보가 아니라 다윗 가문의 족보냐? 따지는 것은
인간적인 시비이지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와 신비에 대한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초월적인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내재적인 하느님과 내재적인 사랑이 되려면
어딘가 또 누구에겐가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것은 제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 안으로 오시고 주님을 제가 제 안에 모셨다고
누가 하느님께 시비하고 저를 시기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제게만 오셨다면 왜 자기에게는 오시지 않고 제게만 오셨냐고
주님께 따질 수 있고 저를 시기할 수 있겠지만
그에게도 가셨다면 주님께 시비해서는 안 되고 저를 시기해서도 안 되겠지요.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하느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고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차별 없이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들어오신다는 것이며,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도 하느님이 그렇게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