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의 도구
대림시기는 하느님께서 오시도록 사람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다.
무엇을 더 준비하기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배우는 시간,
내 뜻과 내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말씀께서 머무르실 빈자리를 마련하는 시간이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은 마리아 한 사람의 신앙이 아니라 이제 우리 모두에게 건네진 초대이다.
말씀이 살과 피를 입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전능을 앞세우지 않으셨다.
작고 가난한 한 여인의 자유를 존중하셨고,
그의 ‘예’ 안에 당신의 구원을 맡기셨다.
마리아의 몫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무엇을 해내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몫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이었다.
말씀에 굴복하여 자기 중심이 물러난 그 빈자리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도록
몸과 삶을 후원하는 것, 그것이 마리아의 위대함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몫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이전에,
한 인간이 하느님께 당신의 삶을 맡겼다는 신비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격을 부여할 수 없는 사람들,
자기 힘으로는 올라설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가난함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시기를 원하신다.
도구적 존재란 하느님을 대신해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도록 길을 열어 드리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해 주시도록 그들의 필요성에 협력하는 일,
그들의 사정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마음을 헤아리는 일,
말씀께서 사랑으로 태어나도록 관계 안에서 기다려 주는 일,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 자리를 내어드린 날이다.
오늘도 말씀은 새로운 육화를 기다리신다.
우리의 말과 손과 시선 안에서 사랑이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한다. “주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당신께서 일하시도록
조용한 후원자로 남게 하소서.”
대림의 기다림 끝에서 성탄은 그렇게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길이 되는 순간에.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보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의존하기로 선택하셨다는 데서 그 깊이가 드러난다.
전능하신 분께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몸으로 오셨다.
젖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안아 주지 않으면 울 수밖에 없는
연약한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돌보실 수 있는 능력을 잠시 내려놓고
한 인간의 품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셨다.
마리아의 팔, 마리아의 젖, 마리아의 숨결과 체온 안에서 하느님은 살아 계셨다.
이것이 육화의 겸손이다. 힘으로 다스리지 않고, 사랑받음으로 존재하시며,
보살핌을 받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선택이다.
그분은 사람 위에 서지 않으셨고 사람 아래로 내려오셨다.
가르치기 전에 맡기셨고, 명령하기 전에 의존하셨다.
그 사랑의 깊이는 우리가 감히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낮아짐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비는 베들레헴의 밤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같은 방식으로 오신다.
돌봄이 필요한 이웃 안에서,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사람의 눈빛 안에서,
기다려 주지 않으면 무너져 버릴 관계 안에서
그분은 여전히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견딤, 우리의 따뜻한 품을 당신의 거처로 삼고자 하신다.
육화는 끝나지 않았다. 말씀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 안에서
살과 피를 입기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아 줄 때, 판단보다 마음을 헤아릴 때,
서두르지 않고 함께 머물 때, 그분은 다시 태어나신다.
하느님은 높은 곳에서 증명되지 않는다.
아주 낮은 자리에서, 사랑받을 때 비로소 드러나신다.
이것이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분의 사랑이며,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하느님의 실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