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알아차리는 느린 길
서두르지 말고 이 글을 읽는다기보다 머문다는 마음으로 한 문장, 한 숨마다 천천히 걸어가 봅니다.
하느님의 이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 말은 교리가 아니라 관계의 고백입니다.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라 살아 보아야 비로소 알게 되는 존재의 진실입니다.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정말 함께 계신가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외롭고, 왜 이렇게 무거운가요? 그러나 임마누엘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보여 주기보다 동행하시고, 해결하기보다 곁에 머무르십니다.
1. 함께 계심은 ‘느낌’이 아니라 ‘자리’입니다.
임누엘은 감정이 아닙니다. 눈물이 나야 계신 것이 아니고, 위로가 즉각 느껴져야만 계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함께 계심은 사라지지 않는 자리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못해도, 내가 믿음이 약해도, 내가 마음속에서 등을 돌려도, 그분은 자리를 비우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느끼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분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빠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항상 먼저 와 계십니다.
우리를 기다리며 아무 말 없이.
2.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가장 깊은 현존입니다.
하느님이 침묵하신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말씀이 없고,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을 때. 그러나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거리입니다. 사랑하는 이 곁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처럼, 임마누엘은 말보다 함께 있음 자체로 다가오십니다. 그 침묵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아, 지금 설명이 없지만 혼자는 아니구나.”
3. 임마누엘은 약함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강할 때보다, 잘할 때보다, 확신에 찼을 때보다, 우리가 무너질 때,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을 때, 기도조차 포기하고 싶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임마누엘은 가장 분명히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고쳐서 쓰지 않으시고, 연약함 안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사십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전능의 과시가 아니라 의존의 선택이었습니다. 젖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몸, 안아 주지 않으면 울 수밖에 없는 존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함, 그 자리를 하느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은 인간의 약함을 견디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 약함을 자신의 집으로 삼으신 하느님입니다.
4. 함께 계심은 ‘문제가 없어짐’이 아니라 ‘동행의 지속’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문제가 사라질 거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방식은 다릅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데, 길은 여전히 가파른데,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을 힘이 생길 때, 그것이 함께 계심의 표지입니다. 임마누엘은 폭풍을 항상 잠재우지는 않지만, 폭풍 속에서 배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5.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아주 작은 징표들로.이유 없이 숨이 깊어질 때, 분노 대신 침묵을 선택하게 될 때, 포기하려던 순간에 한 걸음을 더 내딛게 될 때,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일 때, 기도는 없는데도 감사가 남아 있을 때, 그 모든 순간은 임마누엘의 조용한 흔적입니다. 그분은 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을 통해, 일상의 작은 선택을 통해,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해 열릴 때.
6. 임마누엘은 ‘찾아야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은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함께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증명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조금 느리게 숨 쉬고, 조금 덜 판단하고, 조금 더 정직해지는 것. 그때 우리는 문득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아, 내가 그분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주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달라고 조르기보다 이미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수 있는 조용한 마음을 주소서. 설명 대신 신뢰를, 해결 대신 동행을, 확신 대신 머묾을 선택하게 하소서. 오늘도 여기 계신 임마누엘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