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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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베드로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그물을 던지다
주님께서 영적 고기잡이를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도록, 베드로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고 헛수고만 했습니다. 이제 저는 고기잡이 도구가 아닌 은총으로, 숙련된 기술과 근면 대신 경건한 헌신과 인내로 고기를 잡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며 그물을 내릴 때, 실제로 그가 내린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스승의 명에 따라서 잘 짜이고 손질된 그물을 내릴 때, 실제로 그는 구원자의 이름으로 적절하고 분명하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그는 재물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건져 올립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없는 어둠속에서 앞을 볼 수 없던 이전의 베드로는 밤새도록 헛수고만 했지요. 그런데 구원자의 빛이 그를 비추자 어둠은 흩어졌고, 그는 전에 볼 수 없던 깊은 곳을 믿음으로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토리노의 막시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들은 것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발언은 낳음이고, 아들의 경청은 태어남의 행위입니다. 이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그렇습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우리에게 드러내셨고, 그 가운데 눈곱만큼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설령 천여 차례나 들었다고해도,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이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께 어떠한 것도 감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무언가를 감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원한 복 가운데 상당수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에 관한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에게 알아듣기 힘든 말로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에게 여러분 자신을 바치면 바칠수록, 하느님은 그 보답으로 여러분에게 자신을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여의면 여윌수록, 여러분의 영원한 복은 더욱 엄청날 것입니다. 하느님이 몸소 가르쳐 추신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그 사건이 내게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버지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는데, 이는 “하느님,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을 비워 주십시오”라고 끊임없이 부탁하는 행위인 것입니다.(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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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5. 프란치스코와 불과 물 그리고 바위와 통나무
성 프란치스코는 작은 피조물 가운데서도 특히 불을 더 사랑하였다. 이것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불의 본기능을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난로 가까이 앉아 있다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린넨으로 된 속옷 무릎 부분에 불이 붙어 버렸다. 그는 열기를 느끼고도 끄려하지 않았다. 그의 동료가 옷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갔으나 성 프란치스코는 그 불을 끄지 못하도록 만류하면서 “친애하는 형제여, 불 형제를 해치지 말아요!”라고 했다.
그래서 이 동료는 수위하는 형제에게 달려가서 그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데려 왔다. 그 수위 형제는 성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불을 꺼버렸다. 그는 이처럼 불을 좋아하였으며 비록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등불이든 촛불이든 끄지 않았다. 또 형제들이 자주 불이 타고 있는 장작이나 불이 완전히 붙지 않고 연기만 나는 장작을 이리 저리 던지기가 일쑤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불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의미에서도 땅 위에 잘 쌓아 두도록 하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 산에서 사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동료는 그가 언제나 식사할 때만 이용하는 초막에다 정찬 시간이 되면 불을 피워 놓았다. 불이 탈 때쯤 자기가 기도하던 초막에서 성 프란치스코를 모시러 갔다가 그날의 복음을 읽어 드리기 위하여 미사 경본을 가지러 갔다. 왜냐하면 사부께서 미사 참례를 할 수 없을 때마다 그날의 복음 말씀을 식사 전에 듣고 싶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식사 준비때문에 불을 피워 놓은 초막에 돌아오자 불길이 이미 지붕에 번져 활활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불을 끄는데 최선을 다했으나 혼자 힘으로는 끌 수가 없었다. 그때 성 프란치스코는 그를 도와 함께 불을 끄려 하지 않고 있었다. 고작 밤에 덮고 잘 모피를 집어 들고 숲속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형제들이 이 초막이 불타는 것을 보고 서둘러 와서 꺼주었다. 얼마 후에 성 프란치스코는 식사하러 돌아왔다. 그는 식사하면서, “나는 그 모피를 다시 덮지 않을 것입니다. 내 탐욕 때문에 불 형제가 그 모피를 태우도록 버려 두지 못했기 때문이오”라 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불 다음으로 물을 특별히 더 사랑하고 있었다. 물은 거룩한 회개와 시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물로 더러워진 영혼을 씻는 예식을 행함으로써 영혼이 처음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을 씻을 때마다 물이 발에 밟히지 않는 장소를 택하였다. 마찬가지로 그가 바위를 걸을 때도 반석이라 부르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공손하고 경건하게 걸었다. 또 “저 높은 바위에 나를 올려 세워 주소서”(시편 61,2)란 성구를 암송할 때면 깊은 흠숭과 경배를 드리며 “당신이 저를 바위 아래 두셨사옵니다.”하였다.
불을 피우려고 나무를 자르는 형제 보고는 나무를 통째로 자르지 말고 나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시키신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으로 통나무 그대로 두고 가지만 자르라고 하였다.
-완덕의 거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