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점은 종도 행복하고 죄인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현실은 그 반대이지요.
종이 불행하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주인이 되려고 하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 불행해지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종과 죄인은 불행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종도 죄인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종을 학대하고 죄인을 벌주지만
하느님은 종도 사랑하고 죄인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종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겠는데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여기서 주인 곧 주님은 종 곧 우리를 학대하거나 부려 먹지 않으시고
오히려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드시기에 우리가 행복하다고 합니다.
사실 인간이 인간을 종 취급하고 위에 군림하려고 들지
하느님은 당신은 무화(無化)하고 우리를 신화(神化)하시며
우리를 시중드시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관건은 우리가 그 사랑에 깨어있느냐,
그 사랑을 우리도 사랑하느냐 그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너의 사랑을 내가,
나의 사랑을 네가 사랑할 때 사랑이 이루어지듯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도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것이란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실 때
그것을 깨어 기다리고 있다가 냉큼 받아들이는 겁니다.
연애편지 오기를 기다리다가 도착하면 즉시 받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수취인불명이나 거부로 편지가 되돌아가듯
하느님 사랑도 수취인인 우리가 거부하여 되돌아가곤 합니다.
다음은 죄인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겠는데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주님은 용서의 은총을 내리신다는 말이고,
그러기에 죄가 많을수록 은총이 더 크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가 크고 많으면 그만큼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어 벌이 크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우리 죄가 크고 많아도 그 죄보다 더 큰 사랑이시기에
그 큰 죄와 그 많은 죄를 죄다 다 용서하실 수 있으십니다.
여기서도 관건은 그 사랑과 용서의 은총에 우리가 깨어있느냐 그것입니다.
자기에게 죄가 있는지도 많은지도 모를 수도 있지만
자기 죄가 크고 많다는 것은 아는데 하느님의 은총을 모를 수 있습니다.
내 죄는 보는데 하느님 은총은 못 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회개가 내 죄를 못 보기에 실패하고,
내 죄는 못 보고 남의 죄를 보기에 실패하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경우 내 죄만 보고 하느님 은총을 보지 못하기에 실패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다고 다 은총이 풍성한 것이 아니라
풍성한 은총에 깨어있는 사람에게 은총이 풍성합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종도 행복하고 죄인도 행복할 수 있음을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으로 깨닫고 깨어있는 행복한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