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조숙했는지 어른들이 부르던 <희망가>을 곧잘 따라 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가사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이 가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나의 희망은 뭐였고,
지금 나의 희망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저의 희망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
중간에 제가 프란치스칸이 되었지만,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기에 어림없다고 생각되어 잠시 수도원을 나갔을 때는
신문 기자를 하면서 소설 쓰는 사람이 되는, 그런 희망을 가진 적도 있었지요.
그 후엔 꼭 짚어 얘기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던 같지는 않고,
굳이 얘기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듯이,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처럼 사는데, 그래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이제 하기 시작한 점입니다.
새로운 희망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 아닙니다.
이전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
곧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 제가 들어가는 것이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저의 희망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저의 흔들림 없는 희망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이제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희망을 꿈꾸다가는 도리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저는 제 건강을 근근이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이때 제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없기에
그러기에 도리어 저세상에 희망을 둘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 희망만이 절망이 아니라 저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의 기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뭘 달라는 기도는 줄어들겠지요.
건강을 주십사 기도하기보다는 아프더라도 하느님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플 때 프란치스코처럼 백배의 고통을 더 주십사 하고 청하진 못하더라도
그 고통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때도 늘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