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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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좋은 평화와 나쁜 평화
좋은 평화가 있고 나쁜 평화가 있습니다. 좋은 평화는 착하고 신심 깊고 정의로운 사람들 가운데에 있습니다 ... 왜냐하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지만 평화에 의해서 지켜지고 사랑으로 양육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없는 믿음은 선행의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이 어떤 불화로든지 갈라서게 된다면, 그것은 악한 갈등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느 고을이나 집안도 서로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한다”(마태 12,25)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라 5,15)라는 바오로사도의 말처럼, 형제들이 서로 갈라서면 스스로 파멸하고 맙니다. 반면, 믿지 않는 이들과 간악한 이들 가운데에는 악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죄 많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죄를 짓겠다는 공통된 합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앙과 부정은 마귀의 부추김으로 생겨나지만 평화를 통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믿지 않는 이들과 부정한 이들이 서로 갈라선다면, 그것은 좋은 갈등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있으면, 신앙과 정의가 서는 반면 불신앙과 불의는 잠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화가 일어나면, 신앙과 정의는 가라앉아 버리고 불신앙과 불의가 다시 일어섭니다. 마찬가지로, 간악한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있으면, 불의와 불신앙이 서는 반면 신앙과 정의는 잠들어 버립니다. 조화가 이루어지면, 불신앙과 불의는 가라앉고 신앙과 정의가 일어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악한 일치를 깨뜨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좋은 불화를 가져오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치 불화라는 한집에 살듯 함께 살아 왔습니다. 모든 사람 곧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함께, 더러는 악을 추구했기 때문에 악에 머물러 있고, 더러는 선을 몰라서 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진리의 말씀인 불화의 칼을 가져오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는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둘째 오솔길에서 우리는 버림과 그대로 둠의 길을 여행했다. 둘째 오솔길은 우리의 버림이 철저해야 하며, 두려움과 죽음과 불신과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다그친다. 우리는 결국 버림까지도 버려야 할 것이다.
버림까지 버릴 줄 알 때, 우리는 어떻게 출산이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다. 둘째 오솔길은 성서의 참 포도나무 비유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하기에 셋째 오솔길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고, 어떻게 낳고, 이 낳음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엑카르트는 창조계를 받아들이는 긍정의 길과 버림을 수행하는 부정의 길을 여행할 때 일어나는 세가지 탄생을 마음에 그린다. 이 탄생은 다음과 같다: 돌파함으로써 의식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탄생,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탄생,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탄생. 셋째 오솔길에 실린 설교 전체를 두루 관통하는 신학은 단연 인간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신학이다. 엑카르트는 신성이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감행하는 돌파에 관심을 가진다. 실로,그는 “하느님의 본질은 낳음이며" 낳는 자만이 신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425)


<금주간 성서읽기> 로마 14-16장 / 갈라 1-3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로마 14,13-23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지 마라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나는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
그대의 형제가 음식 문제로 슬퍼한다면, 그대는 더 이상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음식으로 형제를 파멸시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그 좋은 것이 모욕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음식 때문에 그르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먹어 남에게 장애물이 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그 밖에 무엇을 하든, 그대의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대가 자기의 것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느님 앞에서도 그대로 지니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