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주제는 ‘가까이 있음’과 ‘멀리 있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오늘 첫째 독서 신명기가 하느님 말씀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말하고,
복음에서 주님은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뜯어보면 진정한 가까움은 거리나 물리적인 가까움이 아니라
마음의 가까움이고 마음의 가까움은 사랑만큼의 가까움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느님 사랑과 우리 사랑의 가까움과 멂을 보겠습니다.
오늘 창세기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로 그만큼 가까이 있는지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데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께 얼마나 가까운지 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내리사랑과 치사랑만큼 기울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어머니와 아들 간의 사랑을 예로 들면 아들의 어머니 사랑이
어머니의 아들 사랑에 훨씬 못 미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온 관심이 아들에게 쏠리게 만들지요.
관심이란 누구 또는 무엇에 관한 마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관심이 온통 아들에게 있는 어머니의 사랑은 몸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또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마음은 아들에게 가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은 아들에게 가 있어 늘 아들과 가까이 있는 데 비해
아들의 마음은 어머니가 아닌 것에 가 있어 늘 어머니와 멀리 있습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도 마음이 다른 데 있어서
결국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지만
아버지는 마음이 늘 아들에게 있고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바로 가까움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래서 다시 우리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사랑이 어디에 있고,
마음 안에 무엇이 있고,
곧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가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차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계명이 마음에서 멀리 있지 않게 되면
이웃도 우리에게 멀리 있지 않고 가장 가까운 이웃부터 사랑하고,
점차 멀리 있는 이웃까지 우리의 사랑이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나에 갇혀있지 않고,
우리 사랑이 가족에 국한되지 않고,
점차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로부터,
그다음 가까운 이웃인 가족들에게,
그다음 가까운 이웃인 친구들에게,
생면부지의 먼 이웃인 사람들에게,
심지어 강도를 만난 원수들에게도 사랑이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요즘 연달아 죄송합니다.
금요일엔 늦잠을 자느라 지난 강론을 올렸고,
어제는 토요일인데 금요일 강론을 올렸습니다.
이주민 캠프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는,
저의 분주한 마음 때문임을 고백하며 양해 바랍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