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는데
다른 민족에게는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주님께서 원치 않으시기에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같은 복음 맨 마지막에서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다른 사명 곧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러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지금 여기서부터’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또는 ‘지금은 우리 가정에서부터’라는 말씀도 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사도로 뽑힌 지금은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복음 선포는 나중으로 미루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부터 찾으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자기 가정부터 복음화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종종 자기 가정은 팽개치고 전도한답시고 길거리로 나가는 사람이나
가정 살림은 돌보지만 신앙 면에서는 자기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복음 전하러 가는 사람에게 주님은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겁니까?
마음이 없어서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제일 사랑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가족에게 복음 선포하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구절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처음부터 복음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일 사랑하기에 바라는 것이 제일 많고
그래서 상처를 제일 많이 주고받는 것이 가족이지요.
그리고 이미 인간적으로 상처를 주고받은 상태에서
복음적 사랑이 뚫고 들어가는 것이 싶지 않고,
아직도 복음적 사랑이 앞서지 못하고 감정이 앞서기에
밖에 나가서는 복음적 사랑을 시도하고 집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뿐이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치색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적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복음적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복음적 사랑이 정치적 견해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제가 아는 한 부부는 아주 모범입니다.
인간적 성숙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뿐 아니라
복음적 사랑으로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복음을 살고,
가정에서부터 복음적 사랑을 살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