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인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유다인들로부터 괴롭힘과 살해 위협을
받고 그래서 그곳을 피해 간 곳에서는 화신(化神)의 대우를 받습니다.
말하자면 극과 극의 대우를 받은 것인데 제가 생각하기에 둘 다 위험한 겁니다.
그런데 괴롭힘과 살해 위협은 육적인 면에서 위험한 것이라면
화신의 대우는 영적인 면에서 위험한 것이 차이점인데
제 생각에 영적인 위험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칭찬과 반대 가운데서 영적으로 더 위험한 것이 칭찬인 것과 같습니다.
사실 칭찬이나 아부 같은 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를 주님과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니 반대를 받는 것이 영적으로는 더 유익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내가 하려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또는 나쁜 것인지 식별하게 하고,
신앙인에게는 그것이 하느님 뜻에 의한 것인지 내 욕심인지 식별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이 왜 반대할까?
내가 하려는 것이 나쁜 것이기에 반대하는 것일까?
하려는 것은 좋은 거지만 그가 나쁜 사람이기에 반대하는 것일까? 식별케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식별한 다음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반대를 무릅쓰고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반대를 무릅쓰고 하느님 뜻을 따르기로 선택했을 경우
선택의 은총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도 반대를 무릅쓸 때 힘을 더 내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대를 이겨야 할 수 있으니 반대를 이기기 위해 힘을 더 내게 되잖아요?
붙잡는데도 가려면 붙잡는 힘보다 더 힘이 세야 갈 수 있는 것과 같지요.
그리고 인간이 반대하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할 경우
우리는 하느님의 힘을 선택할 것이고,
하느님의 힘으로 그것을 해낼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
그것이 성령이고 성령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성령의 사랑이 함께합니다.
이것 말고도 반대의 영적인 의미와 이익이 많습니다.
그 반대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 순종하게 하는 영적 의미와 유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한 사람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유익은 덤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대자를 보내주셨구나! 하며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반대자와 반대를 영적인 힘을 얻는 기회,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