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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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변덕스러운 믿음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변덕스러운 믿음이라는 쭉정이는 유혹이라는 돌풍이 불 때마다 저 가고 싶은 만큼 멀리 날아가 버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곳간에 쌓일 곡식 더미는 한결 깨끗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북하게 느낀 제자 일부가 그분께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그때문에 그분을 따르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생명의 말씀이며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그분께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조용히 물으신 뒤에도 끝까지 그분과 함께했습니다. 피겔로스와 헤르모게네스, 필레투스, 히메내오스 같은 자들이 그분의 사도를 버린 것(참조: 1 티모 1,20; 2티모 1,15; 2,17)은 상대적으로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한 자는 사도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교회들이 일부 인간의 버림을 받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우리가 겪는 일은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데도 말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요한 2,19) 라고 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설교 17에서 엑카르트는 버림은 육체나 감각을 억누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말했다. 그는 본 설교에서도 일부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지의 길 내지는 지성을 버리는 길은 지식을 억누르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15세기에서 오늘날에 이력까지 근본주의의 영성신학자들, 예컨데 토마스 아 캠피스 같은 신학자들이 이처럼 중요한 엑카르트의 견해를 마음에 새겼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애석하게도 엑카르트의 견해는 단절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엑카르트가 이단으로 단죄된 이후로는 영성이 부정의 길과 “수덕신학”(ascetic theology : 고행과 금욕을 강조한 신학. 이 용어는 17세기에 창안되었다)만을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수덕신학은 창조계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엑카르트가 말하는 영적 여정의 첫째 오솔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가 앞의 설교에서 살펴보았고, 엑카르트가 본 설교에서 넌지시 말한대로, 부정의 길을 걷는 목적은 피조물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엑카르트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시금석이라고 말했다. 엑카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속사람을 키우는 목적은 사람들을 내향화하기 위함도 아니고 바깥 활동을 등지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이것은 앞으로 셋째 오솔길과 넷째 오솔길을 살펴보면서 차츰 분명해질 것이다. 속사람을 키우는 목적은 우리의 바깥 활동으로 하여금 우리 내면의 심층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하고, 우리의 신적인 근원에 맞갖게 하기 위해서다. 부정의 길은 이 세계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부정의 길의 목적은 이 세계와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데 있다.(385)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0,17-38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왜 지구 문명사 속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해 왔고, 지구촌이 실현되었다는 21세기에도 여러 가지 종교가 공존하는 것일까?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다시 말해서 문명과 단위 사회 안에 엄연히 수억 명 , 수천만 명 , 수백만 명 단위의 경건하고도 진실한 종교 귀의자를 지닌 타 종교들의 정치 사회적 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극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지구촌의 깨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종교의 다양성이 오히려 존중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사와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이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다. 나와 다른 것, 나와 차이가 있는 것,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대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삶과 진리 경험을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성숙한 자각이 힘을 얻어가기 때문이다.
지구촌의 사상계, 특히 정신과학이나 시회과학의 영역에서는 ‘독단적 진리’ 주장이나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한 진리 체계를 특정 종교 집단이나 특정 학파가 홀로 독점하고 있다는 주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진리 담론은 역사적 . 문화적 . 사회적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설혹 인격적 신의 특별 계시에 기초한다고 주장하는 셈족계 종교들일지라도, 계시의 발원지가 ‘초월적 차원' 임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 계시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의미가 이해되고 응답될 때라야만 신적 계시는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바, 바로 그 인간의 수용-이해-응답의 과정에서 ‘해석학적 제약과 착색'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종교 다원론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철학적 . 종교학적 . 신학적 담론들을 해석학이라는 이해 이론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