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공생관계라는 말이 있는데
공생은 좋은 의미이고 공생관계는 다 좋은가?
오월동주(吳越同舟)나 적대적 공생도 있고
각방 쓰는 부부의 공생도 있는데 공생관계는 다 좋은가?
이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공생에는 좋은 공생도 있지만
나쁜 공생 또는 그다지 좋지 않은 공생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주 금요일에 읽은 사도행전의 초기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가는 좋고도 완벽한 공생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더 좋고도 완벽한 공동체는
오히려 오늘 사도행전에서 드러나는 공동체입니다.
그들만의 좋은 공동체 또는 그들끼리의 좋은 공동체는
좋은 공동체인지 모르지만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고
신앙적으로 보면 더더욱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간혹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는 참으로 훌륭한 친교를 나눕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들은 훌륭한 계모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이 모일 때 하느님 얘기를 하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데
자기들의 사랑과 친교가 자기들 밖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자기들끼리 깨 볶는 냄새가 나지만 복음 선포하지 않는 공동체는
하느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고
이런 공생은 자기들끼리 아무리 같이 잘 살아도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오늘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오히려 복음적인 공동체입니다.
스테파노의 죽음과 박해로 예루살렘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생관계는 깨지고 공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이 은근히 암시하는 바이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고,
여기에 하느님의 다목적이고 영적인 숨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흩어진 신자들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갈등과 반목 끝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수들의 박해를 이용하여 신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들이 실은 원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구이고,
박해도 박해가 아니라 복음을 더욱 치열하게 선포하게 하는 채찍입니다.
둘째로 박해자인 바오로가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하느님께서 역사하신 겁니다.
박해하다가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지만
꿋꿋하고 복되게 순교한 스테파노와 신자들을 도구 삼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들 가운에서는 극과 극이 상극으로 끝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극과 극이 통합니다.
흩어진 것이 복음 선포의 기회가 되고,
박해자가 복음 선포자가 되는 것 같이.
오늘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가정 공동체이든 수도 공동체이든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얼마나 복음적인 공동체인지?
한마음 한뜻의 공생 공동체인지?
껍데기만 공생이고 제각각 살아가는 공동체는 아닌지?
공동생활도 잘하지 못하고 복음 선포도 하지 않는 공동체는 아닌지?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