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 끝에 내리는 가을비
타는 목마름을 오래 견뎌낸 대지 위로
마침내 가을비가 내립니다.
서두르지도 않고 무엇을 재촉하지도 않은 채,
오래 기다린 이의 어깨에 손을 얹듯
비는 조용히 들과 산을 적십니다.
오래된 기와의 골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가
메마른 계절의 깊은 한숨을 쓸어내리고,
갈라진 흙 틈으로 스며든 물은
말없이 땅의 상처를 어루만집니다.
얼마나 목말랐을까요.
한여름의 뜨거운 볕 아래
아무 말 없이 견디어 온 들판은
이제야 긴 숨을 내쉽니다.
비안개 너머 황금빛 들녘은 더욱 깊어지고,
고개 숙인 벼 이삭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힙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낮추는 것은
벼만이 아닌가 봅니다.
뜨거운 계절을 지나온 것들은
제 안에 무엇이 여물었는지를 자랑하기보다
조용히 몸을 낮춥니다.
알밤과 도토리는
빗물에 오래 씻겨
더 단단하고 옹골진 빛을 품고,
누런 콩잎들은 잊혀진 계절의 옷을 갈아입고서
빗물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말없이 땅을 향해 내려앉습니다.
바람의 길을 따라 곱게 빗질한 억새들은
촉촉해진 들판 위로 하얀 몸을 낮춥니다.
가을은 그렇게 모든 것을 낮추어 놓습니다.
벼도 낮아지고, 억새도 낮아지고,
열매를 품었던 가지도 낮아지고,
한 계절을 뜨겁게 살아낸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낮아집니다.
알알이 여문 낱알 곁으로
가을 과실의 달고 깊은 향기가 번지고,
비에 씻긴 노란 국화는
싸늘해진 공기 속에서
더욱 맑은 향기를 피워 올립니다.
꽃은 마지막까지 향기를 내어주고,
나무는 마지막까지 열매를 내어주며,
들판은 자신이 품어 키운 모든 것을
사람들의 손에 넘겨줍니다.
어쩌면 가을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진 데 있지 않고
다 내어줄 수 있게 된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구름 사이 모습을 드러낸 산자락도
어느덧 젊은 날의 짙은 초록을 벗고
욕심을 내려놓은 노년의 빛깔로 물들어 갑니다.
붉은 잎 하나, 누런 잎 하나,
붙잡지 않고 바람에게 내어줍니다.
한때 제 몸을 가득 채웠던 것들을
때가 되면 놓아주는 나무처럼,
우리의 삶도 마침내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가뭄 끝에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문득 알게 됩니다.
메마름도 삶의 한 계절이었다는 것을.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 같았던 시간에도
땅속 깊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견디고 있었으며,
타는 목마름 속에서도
생명은 제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이 비는
단순히 메마른 땅을 적시는 비가 아닙니다.
오래 견딘 것들에게 내려오는 위로이며,
끝까지 기다린 것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며,
우리 힘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음을
가만히 깨닫게 하는 하늘의 손길입니다.
목마른 곳을 찾아 자신을 내어 주는 비는
높은 곳과 낮은 곳을 가리지 않고
들판과 돌담과 지붕과
이름 없는 풀잎 하나까지 적셔 줍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도 조금씩 배웁니다.
사랑이란 어쩌면 이렇게 비처럼 내려가는 것임을.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내어주고,
메마른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말없이 스며드는 것임을.
가뭄 끝에 찾아온 가을비는
지나온 뜨거움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뜨거움을 품어
더 깊은 결실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모든 여문 것들을 품에 안고
천천히 겨울 쪽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므로 이 비는
한 계절의 끝에 찍히는
거룩한 마침표이면서,
다시 시작될 생명을
보이지 않는 땅속에 맡겨 두는
고요한 시작입니다.
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오래 목말랐던 대지 위에,
고개 숙인 황금빛 들녘 위에,
그리고 긴 세월을 지나오며
조금씩 비우고 낮아지는
우리의 가난한 마음 위에.
가을비가 은총처럼 내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