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43ㄴ-45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놀라운 일에 놀라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들뜬 분위기와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곧 ‘십자가’의 예고입니다.
여기에 오늘의 핵심 대비가 있습니다.
군중은 ‘기적(볼거리)’에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움 너머의 ‘깊은 말씀(십자가)’을 가리키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귀담아듣다’는 그저 스치듯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담아 새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알아듣지 못하였고…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놀라움에는 함께했지만, 깊은 말씀 앞에서는 귀가 닫혔습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일깨우듯,
‘놀라워하는 것’과 ‘알아듣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군중은 예수님께 놀라면서도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볼거리를 지나
고요히 ‘귀담아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 주간의 마지막 날에, 이 말씀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한 주간 우리는 음악·미술·시·독서의 아름다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늘 위험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놀라워하기만(구경하기만)’ 하고,
정작 그 깊은 뜻은 ‘귀담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로데도 구경하려 했고, 군중도 기적에 놀랐습니다.
우리도 문화를 볼거리로 소비하며,
정작 깊은 말씀은 흘려버릴 수 있습니다.
참된 문화, 참된 들음은 ‘놀라움’을 넘어 ‘알아들음’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요와 주의(注意)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은 ‘영성 주간’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영성 주간은 고요·침묵·쉼·단순한 삶의 주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청하신 ‘귀담아들음’이야말로
바로 그 영성의 시작입니다.
소란과 볼거리를 잠시 내려놓고 고요해질 때,
비로소 그 깊은 말씀이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놀라워하기만’ 하고 깊은 말씀은 흘려버리지 않는가?
나는 볼거리를 지나 ‘귀담아듣는’ 고요를 지니는가?
나는 알아듣지 못할 때, 두려워 말고 ‘묻고 머무는가’?
나는 말씀도 창조도 이웃도 ‘올바른 마음으로’ 듣는가?
주님,
놀라움에 멈추지 않게 하소서.
소란을 내려놓고 고요히 당신의 깊은 말씀을 귀담아듣게 하시어,
그 들음이 참된 영성의 시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