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미사의 감사송은 베드로를 “신앙고백의 모범”이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올바로 답한 것 때문에 그리 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신앙을 정말로 고백한 것일까요?
혹시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정체를 그저 얘기한 것은 아닐까요?
알고 있는 것을 얘기하는 것과 신앙을 고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믿는 것을 고백하는 것보다
무게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도 그러하고,
말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의 차이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우선 무엇을 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아는 것 중의 하나 정도로 가볍고,
그리고 아는 것일 뿐 믿는 것처럼 자기 전부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비해 믿는다는 것은 믿을 만한 대상이 거의 없기에 쉽게 믿지 못하고,
자기 전부를 걸어야 하기에 가볍게 믿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딸 것을 뻔히 알기에 가진 것을 다 거는 것은
사실은 전부를 거는 도박이 아닙니다.
그러나 딸 것이라고 믿고 가진 것을 다 거는 것은
전부를 잃을 수도 있기에 그만큼 절박하고 그래서 진정 전부를 거는 겁니다.
그리고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은 지식을 뽐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의 진실을 토로하는 것이기에 이 역시 전부를 토로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귀도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주님의 정체를 밝히지만
그것이 베드로처럼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아니지요.
즉시 이어지는 마귀의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치 박해 때 배교자가 신자들의 정체를 밀고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고,
그렇기에 비록 그 믿음이 약하여 세 번 모른다고 배반을 했지만
마침내는 자기의 믿음 고백대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도 믿음이 약할 때는
마귀가 했던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를 부정하였지만
믿음이 반석처럼 굳건해졌을 때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거지요.
주님께서 시몬 바르요나를 반석 삼은 것은
그 인간 됨됨이가 믿을만하기에 반석 삼은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가능성을 보고 그를 반석 삼으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같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고백하지만
살다보면 살짝 눈을 감고 주님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만 바라보고 갈 때는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을 보자 겁이 나 물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건너는 우리도
세상의 거친 파도를 보면 주님을 보지 않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두려워하는 바로 그 때 주님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데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두려움에 빠지고 난 뒤에야
주님을 보고 살려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나의 믿음에 실망하고 포기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인 베드로 사도도 이런 나약한 믿음에서
반석과 같은 믿음으로 성장하였으니 우리도 그런 희망을 가지고
믿음의 여정을 계속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