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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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태 12,19)
그는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예언자는 구원자의 온유함과 그분의 형언할길 없는 권능올 미리 찬양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크고 효력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이사야도 유대인들을 덮칠 병에 대해 예고했습니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가 선택한 이, 내 영혼이 받아들인 이,내가 그에게 나의 영혼을 주었으니"(이사 42,1 칠십인역).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넘어서시는 것은,율법을 주시는 분의 원수인 적수로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시는 분과 한마음이며 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서 하시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이시야는 주님의 온유함을 찬양하며,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이사 42,2)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의 참뜻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치유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을 밀어내므로, 그분은 반항하는 그들과 더 이상 싸우지 않으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먼저 다음 구절을 생각해 봅시다.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은밀한 말씀이 내게 선포되었다" 오, 주여, 이 침묵은 어디에 있으며, 이 말씀이 발설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은 영혼의 가장 순수한 자리, 영혼의 터, 영혼의 본질, 영혼의 감추어진 곳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수단들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피조물도, 어떠한 상도 거기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영혼은 행동하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그곳에서 영혼은 자기가 만든 것이든 아니면 다른 피조물에게서 온 것이든 간에 어떠한 상도 인식하지 않습니다.
혼이 성취한 모든 업적은 영혼의 기능에 의해 성취된 것일 따름입니다.
영혼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을 통해서 된 것이고, 영혼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기억에 의해 떠오른 것일 따름입니다. 영혼이 사랑한다면, 그것은 의지를 사용하여 그렇게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와같이 영혼은 자신의 기능들을 통하여 활동하지 본질을 통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모든 활동은 어떤 매개물에 의존하게 마련입니다. 보는 기능은 눈을 동해 효과를 발휘합니다. 눈이 없으면 영혼은 보이는 것을 써먹을 수도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영혼은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그런 식으로 활동합니다. 영혼은 매개물을 통해 자신의 모든 외부 활동을 완수합니다. 하지만 존재 안에는 어떠한 행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활용하는 기능들은 존재의 터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터에서는 수단들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429)


<금주간 성서읽기> 로마 14-16장 / 갈라 1-3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종교 다원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담론에서 무지개를 은유로 사용한다는 것은 우선 생각만 해도 즐겁다. 도심의 매연에 찌든 생활을 하던 시민들은 어느 날 하늘 저편 창공에 떠오른 무지개를 바라보고 동심에 젖어든다.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기억하든 않든, 각박한 현실과 경쟁적인 삶 속에서 잠시나마 이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시민은 감격 한다
종교 다원론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무지개 모델이 가지는 이유는 매우 감동적이고 큰 설득력을 준다. 이 은유를 가장 잘 설명한 이는 인도 태생의 가톨릭 신부 라이문도 파니카이다. 그는 존 힉과 함께 20세기 후반 기독교권 내의 대표적인 종교 다원론자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은 선적 실채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통과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 녹색이 황색이 아니듯 힌두교는 불교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색상을 바라볼 때 어디서 황색이 끝나고 녹색이 시작되는지 그 경계를 알아낼 길이 없다. 그 경계를 임의적으로 설정해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떤 특수한 색깔, 다시 말해서 어떠한 종교를 통해서도 그 백광(白光)이라는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거기에 광선이 조금이라도 비치고 있는 한, 그들의 목적이다 완전함 또는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