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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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거룩한 이름을 주심에 감사하는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 마음에 머무르게 하신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해
또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지식과 믿음과 불사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368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주님,당신 교회를 기억하시어
악에서 교회를 구하시고
교회를 당신 사랑으로 완전케 하소서.
또한 교회를 사방에서 모으소서.
거룩해진 교회를 그를 위해 마련하신
당신 나라로 모으소서.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다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결혼한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내가 염두에 두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기도와 단식과 밤샘과 모든 종류의 외적인 고행에 매달리는 자들입니다. 모든 종류의 고행에 대한 아집은 여러분의 자유를 앗아가고 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이 빛을 통해 여러분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치시는데, 여러분은 마치 아무 할 일이 없다는 듯이, 다른 일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이, 달리 할 일이 없다는 듯이, 이 빛 속에서 하느님 한 분만을 자유로이 따르고자 하지만, 고행에 대한 아집이 여러분의 자유를 앗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아집과 의도적인 고행은 여러분에게서 이 새로운 자유를 앗아갈 따름입니다. 나는 이러한 아집과 고행을 일컬어 “일 년”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이기적으로 시작한 고행을 그만두지 않는 한, 아집과 고행을 통해서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아집에서 시작한 고행을 완수하기 전에는 하느님도 신뢰하지 못하고, 여러분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행을 완수하기 전에는 도무지 명확함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일 년”이라고 못 박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고행의 열매는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행의 열매는 아집에 둘러싸인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결혼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아집에 속박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합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들이 맺는 열매는 조금밖에 안 됩니다.(402)


<금주간 성서읽기> 마르 5-9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3절: 르네상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르네상스 교황:
진지하고 고귀한 에우제니오 4세의 뒤를 이은 르네상스 교황들은 확실히, 이제 발칸 반도에서 서구 전체를 위협하던 터키인들에 대한 공동방어를 위해 다시 한번 유럽을 결속시키려는 시도를 여러 번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무익하였고 또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왜냐
하면 교황직 자체가 점점 보편적인 사명을 잃고. 교황령을 가지고 오직 하나의 소국가적인 영토 정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노첸시오 8세나 알렉산데르 6세 같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세습령”을 단지 자신들의 사유 영지로 간주하고, 가능한 한 자신의 일가친척에게 주려 하였다.
교황들의 족벌주의와 친족 정치는 이러한 배경에서 종교개혁을 넘어서까지 무서운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불행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에는 반황제적인 교황령 정치로 종교개혁을 오랫동안 후원한 바오로 3세( 1534∼1549)와 열광적인 개혁 교황 바오로 4세(1534∼1549)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르네상스 교황들의 소국가적인 정향은, 그들이 자신들의 가장 고유한 보편교회적인 과제인 교회개혁에 충분히 적시에 또 강력하게 임하지 못하게 하였다. 교황령에 대한 근심, 로마를 예술품으로 장식하여 인문주의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은, 일반적인 “교회의 문화 창조력”의 표현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은 지역 영주적인 공명심이었고, 따라서 보편교회에 대한 배신이었다. 사람들은 르네상스 교황들의 로마의 위대한 문화적 업적에 대하여 감탄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이 교회에 위탁한 사명의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그것들은 다른 관점에서 그들의 거절과 대등하지 않다. 이때에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이 시기의 몇몇 - 모두는 아니다 - 교황들의 개인적 • 도덕적인 배신이 결코 아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높은 직책의 종교적이고 보편교회적인 사명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입장이다. 책임은 교황을 선출한 추기경단에도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은 교황들이 추기경들을 임명하였기 때문에 다시 교황에게로 돌아간다.(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