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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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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다미아노에서의 성탄

지금 저는 아씨시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성탄을 지내고 있습니다. 먼동이 트던 아침까지만 해도 포르치운콜라 성당의 우람한 돔이 저 멀리 아스라한 안개 속에 비경이었는데, 9시 아침 기도와 이어 봉헌된 성탄 낮미사가 11시쯤 끝나자 움브리아 평원에서 밀려온 짙은 안개로 산 다미아노 수도원이 차츰차츰 휘감기더니, 천년만년 고요히 정좌하고 있던 수바시오 산마저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 신비스러운 안개 속을 거닐다 낮기도를 바치기 전 잠시 방으로 돌아와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프란치스칸 영성을 배우느라 7년이 넘게 매달렸던 이탈리아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가는 탁월한 길을 열어주신 아씨시 프란체스코 성인과 이 신비의 길로 저를 이끌어주신 은사님들, 그리고 이 신비를 잘 배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신 은인들께 감사를 드리면서 성탄을 맞이하고자 어제 오후 한적한 이곳으로 오게 되었지요.

수바시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아씨시 성 밖 비탈길에 있는 산 다미아노 수도원은 작은 성당과 움브리아 평원의 고요가 어우러져 언제 와도 순례자의 마음을 평화롭게 도닥여주는 소박한 성지라서, 제게는 프란체스코와 클라라의 정취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이곳이 오히려 아씨시의 심장 같이 느껴집니다.

산 다미아노에서의 소박한 성탄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본래 이 성지가 지니고 있는 예스럽고 고즈넉한 정경에다, 열심한 마음으로 작음과 가난을 배우려는 거룩한 수련자들이 맑고 꾸밈없는 목소리로 힘차면서도 부드럽게 바치는 기도가 성당 안에 울려 퍼져, 아씨시 교외의 자그마한 성당에서 성탄을 맞으려는 이들의 경건한 마음을 한층 더 거룩하게 적시어 주었습니다.

낮미사 때였습니다. 제가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을 한분 한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던 중, 핏빛 십자가로 채워진 후광을 이고 있는 그렉치오 동굴의 아기 예수 벽화가 스치면서, 십자가에서 죽을 운명을 지고 태어난 그리스도께로 시선이 멎어졌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끝나게 될 자신의 가엾은 운명을 정녕 알고 태어난 것일까? 비극을 타고난 아기가 한없이 측은했습니다.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한 생명의 기쁨에 슬프디 슬픈 핏빛이 어리어 있다니! 우리는 모두 기쁨과 행복을 꿈꾸고 그리며 새 날들을 맞는데, 그에게는 날들이 밝을 때마다 십자가의 비극이 한 발자욱씩 다가왔구나! 

잠시 눈을 감고, 새로 태어난 내 아들의 운명이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라 그려보았습니다. 그 슬픈 운명이 드리워진 줄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뛰놀기만 하는 아들...... 가슴이 저렸습니다.

젊은 나이에 성부의 이 “혹독한” 뜻을 알아듣고 우리에게 생명으로 들어서는 문을 피 흘리며 열어준 나자렛 예수! 그 가엾은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일생 그의 발자취를 충실히 걸어갔던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미사가 끝나고 사제들이 퇴장하자,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 볼로냐 콘세르바토리오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는 수련자가 장중한 오르간에 맞춰, “주님의 작은 그릇”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해 있는, 요한 세바스천 바하의 칸타타 147의 끝곡을 연주했습니다. 그가 음악적으로 빼어나게 연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산 다미아노에서 한 수련자가 바이올린으로 경건하게 연주하는 ‘천상의 코럴’을 듣노라니, 제 눈에는 저절로 눈물이 고였습니다. 산 다미아노를 찾은 제 가슴 안에 바이올린 선율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줄이야! 

1월 10일이면 귀국하게 되는데, 이렇게 그리스도를 모시고 돌아가게 되어 기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늦게나마 성탄 축하드리고, 우리 마음 안에 오신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로운 새해 맞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08년 12월 25일 산 다미아노에서


생활나눔

일상의 삶의 체험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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