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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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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기도의 영성

 

프란치스칸 기도의 영성은 단순히 기도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삶이 그리스도의 삶으로 변화되는 여정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기도는 일정한 시간을 떼어 하느님께 말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전체가 하느님을 향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육화의 신비를 오늘 나의 삶 안에서 계속 살아내는 사건이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처럼 나 역시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과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도구가 되는 과정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바라본 그리스도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성부와 성령 안에서 살아 계시는 분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영원한 흐름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기도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상호 내어줌과 받아들임, 끊임없이 자신을 선물하는 사랑의 순환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은 그리스도를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영원한 말씀이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세상을 떠나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현존하는 창조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얻는 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흔적이며, 모든 생명은 그분의 숨결을 품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무엇보다 마음의 기도입니다. 머리로 많은 것을 이해하는 것보다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프란치스코는 학문보다 사랑을, 논쟁보다 일치를, 설명보다 체험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마음이 하느님 안에 머물기 시작하면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더 이상 경쟁과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길가의 작은 꽃 한 송이,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가난한 이의 눈빛, 병자의 신음, 형제의 미소까지도 모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사가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중심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기도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은 점차 하느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시선으로 바뀌고, 사람을 판단하던 마음은 품어 주는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은 형제를 살리는 사랑으로 변하고, 소유하려는 손은 내어주는 손으로 바뀌며, 지배하려는 권력은 섬김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기도가 이루는 가장 깊은 열매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또한 육화적입니다. 기도는 성당 안에서 끝나지 않고 식탁으로, 일터로, 공동체로, 길 위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무릎을 꿇는 순간보다 형제를 만나는 순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이를 품어 주는 순간, 먼저 인사하는 순간, 아픈 사람의 손을 잡아 주는 순간, 말없이 기다려 주는 순간,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순간, 기도는 육체를 입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의 기도도 사랑이라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삶을 결코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에서 복음으로, 복음에서 삶으로" 끊임없이 왕복하였습니다. 복음은 삶을 비추고, 삶은 다시 복음을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기도는 현실을 떠나는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며, 하느님 나라를 오늘 여기에서 살아 내는 능력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관상적이면서도 우주적입니다. 관상은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는 것입니다. 태양은 창조주의 사랑을 노래하고, 달과 별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바람은 성령의 숨결이 되고, 물은 생명의 은총을 전하며, 흙은 겸손을 가르치고, 불은 사랑의 열정을 증언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의 찬가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숭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프란치스칸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으로 이끕니다. 더 이상 나는 혼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와 함께 호흡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가 되고, 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며, 나의 삶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공간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성부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시는 성자의 순명, 성부와 성자를 하나로 묶으시는 성령의 사랑이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칸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평화를 얻거나 위로를 경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순환 안에 참여하는 것이며, 육화의 신비를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더 이상 하느님이 멀리 계신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일하고 계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성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부르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복음이 됩니다.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붙들지 않음)은 혼자만의 수행이나 자기 비움의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 방식입니다. 만일 내적 가난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 내어줌 안에서 이해되지 않고, 형제와 자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칫 자신의 경건함에 만족하는 영적 자기애로 끝나고 맙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가난은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는 자유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히 서로를 위해 존재하십니다. 성부는 자신을 모두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자신을 모두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사랑의 순환 자체이십니다. 그 안에는 지배도 경쟁도 비교도 소유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기쁘다."라는 사랑의 기쁨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 가난이란 내 존재의 중심을 ''에게서 '관계'로 옮기는 일입니다.

 

이 진실은 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인정받을 때 마음이 편안하다면, 내 안에서 '내 왕국'이 조금씩 무너지고 삼위일체의 사랑이 숨 쉬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는데도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미 나의 가치는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자의 순명을 배우는 순간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이해하려고 그의 삶을 먼저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서 그의 아픔을 품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다면, 삼위일체 안의 상호 기쁨이 내 안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향기를 내어주고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스스로 먹지 않습니다. 묵묵히 타인을 위해 익어 갑니다. 강물은 자신을 붙잡지 않고 언제나 흘러갑니다. 그래서 수많은 생명을 살립니다. 태양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빛을 내어줍니다. 흙은 누구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씨앗을 품어 줍니다. 프란치스코가 이들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른 이유는 단순한 자연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피조물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삼위일체의 내어주심을 삶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현장에서 내적 가난은 더욱 분명하게 검증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듣는 사람이 되는 것. 이기려고 말하기보다 이해하려고 침묵하는 것. 내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것. 가장 좋은 자리를 찾기보다 가장 필요한 자리를 선택하는 것. 누군가의 부족함을 판단하기보다 함께 짐을 들어 주는 것. 실수한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네는 것. 이러한 작은 행동들은 모두 삼위일체의 관계가 우리의 육체를 입는 순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평생 추구했던 '작음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은 사람이란 자신을 작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이 살아나도록 자기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내적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포기가 아니라 사랑이 흐를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 두는 자유입니다. 결국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가장 깊은 열매는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고, 형제와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며,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완성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은 이러한 관계의 흐름 속에서만 살아 움직입니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을 관계 안에서 선물로 받아들이고, 다시 선물로 내어주는 삶입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더 이상 골방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형제의 미소가 기도가 되고, 가난한 이의 손을 잡아 주는 일이 기도가 되며, 나무 한 그루를 아끼는 일이 기도가 되고, 공동체 안에서 먼저 화해를 청하는 일이 기도가 됩니다. 그곳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계속 육화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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