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그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고 그래서 마침내 찾게 되면
기뻐하지 않겠냐고 당연한 듯 말씀하시는데 누구나 다 그렇게 할까요?
그 ‘어떤 사람’이 나라면 나도 그렇게 양을 찾아 헤매고 기뻐할까요?
저의 수도 생활 경험으로 볼 때 성소에 대해서 누가 고민 가운데 있으면
그가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할 수 있지만 이미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면은
거의 모두 아무리 설득해도 떠나고 맙니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오늘 주님께서 잃은 양을 마땅히 찾아가야 함을 말씀하셔도
마땅히 찾아가지 않고 지레 포기하거나 한번 찾아가 얘기하고 난 뒤 포기합니다.
그리고 떠나고 나면 애석하고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그렇게 내가 애썼는데도
사랑을 무시하고 떠났다고 탓을 그에게 돌리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내가 또는 우리가 잃은 양이 아니라 그놈이 길을 잃은 것이라고,
더 심하게 얘기하면 그놈이 우리 무리를 제멋대로 이탈한 것이라고,
그러니 찾을 필요가 없다고 또는 찾아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성숙은 이런 데서 드러납니다.
미성숙한 사람이나 공동체는 문제가 있으면 그 탓을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돌리고,
나나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그가 사랑받기 부족한 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탓이라고 하지 않고 그의 탓 또는 남 탓이라고 할 때
이미 그와 우리는 갈라선 것이고 거의 포기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이 미성숙하고 잘못 생각하여 공동체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양이 한두 마리라면 개인의 탓이고 일탈일 수 있지만 여럿이라면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사랑과 성숙이 이 정도이기에 성소를 잃게 만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한 자식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한번 사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하나쯤으로 여기는 공동체는 나머지 양을 다 잃을 것입니다.
한두 번 애쓴 다음 할 만큼 했다고 하는 공동체,
곧 사랑의 부족을 반성하지 않는 공동체도 나머지 양을 다 잃고 말 것입니다.
사랑 없는 부부가 같이 살 이유가 없듯이
사랑 없는 공동체에 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쯤이 아닙니다.
너도 하나쯤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사랑과 성숙은 어느 정돈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