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의 공동체는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오늘 주님께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해서
바람이 불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알아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만일 저더러 자기 집에 안 오면 삐질 거라고 하거나
누구네 집이 부잣집이니 그 집은 꼭 들려야 한다고 하면
저는 그때 나는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갈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비슷한 뜻으로 말씀하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분이시잖아요?
또 그러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존재에게 가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초월과 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월하지 않으면 자유롭지 않다.”
이런 뜻에서 저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다음
바로 이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초월해야지만 위로 올라가고,
위로 올라가야지만 이 세상 것에서 자유로워지며,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만 자유로우신 성령을 만난다는 얘깁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하나만 초월하지 못해도,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하나에라도 매어있으면
그 하나가 나를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하고 성령을 못 만나게 합니다.
풍선이 하늘로 오르고자 하나 가는 실 하나에 매여 못 오르듯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풍선은 실 하나로도 위로 오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실에 매여 있는 풍선은 어떻게 그것을 끊고 오를 수 있으며
수없이 많이 소유한 것들과 그것을 소유케 한 그 많은 소유욕에
칭칭 감기고 매여 있는 우리는 어떻게 위로 오를 수 있겠습니까?
맨 것을 하나하나 푸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풀면 다른 욕심이 생기고 그래서 그것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아무 것도 가지지 않기로 하지 않는 한
하나를 버리면 그 없는 것 대신 다른 것을 갖고자 할 것입니다.
앓던 이가 빠져도 허전한데 애지중지하던 것을 버리고 나면
빈자리가 허전하여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칼에 모든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쫓아온 부자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이 바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라고 하신 것처럼 다 팔고,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신자들처럼 다 팔아 내 놓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소유와 탐욕과 욕망을 정당화 하고,
심지어 소유와 탐욕을 세뇌하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못 가져서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소유와 탐욕과 욕망의 노예가 되게 만들고 불행케 만듭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되고,
더 좋은 것을 가지려다가 불행케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치심인데
이 세상은 도리어 주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거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따르고 누구를 따를 것인가 심각하게 도전받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