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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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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음을 묻어둔 자리에서 1

 

산청 성심원에서 보낸 젊은 날의 시간, 한센인들과 맺었던 깊은 정, 수많은 이들을 먼저 보내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피정자로 돌아온 지금, 회상과 더불어 삶의 자리에서 얻었던 마음을 내 인생의 오후를 보내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산청 성심원에 다시 왔습니다. 1986, 종신서원을 1년 앞두고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도, 수도자의 삶이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젊은 날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열두 해를 살았습니다. 돌아보면 참 긴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긴 줄도 몰랐습니다. 하루가 하루를 밀어내고, 계절이 계절을 데리고 지나가는 동안 저는 이곳에서 제 젊음의 가장 뜨거운 시간을 살았습니다.

 

부식을 조달하러 한 주간에 5일을 진주에 있는 시장에 다녔고, 후원회를 맡았으며, 시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원장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의 살림과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어디가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 달려가야 했고, 무엇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을 마련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야 했고, 도움을 청해야 했고, 살림을 걱정해야 했으며, 때로는 서로 다른 마음 사이에 서서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일들은 이상하리만큼 희미해지고 사람들의 얼굴만 남아 있습니다. 한센인 형제자매들의 얼굴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들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열두 해가 지나고, 다시 4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 이 자리에 서 보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내가 그들을 돌본 것보다 그들이 나를 더 많이 받아주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내게 준 것이 훨씬 많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들은 내게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시설을 고치고 살림을 돌보았지만, 그들은 내 안의 허물어진 곳을 오래도록 말없이 고쳐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아픔 곁에 있어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아직 어리고 서툴렀던 한 젊은 수도자의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래서 성심원은 내게 단순한 근무지가 아닙니다. 내 젊음의 일부가 아직도 살아 있는 곳입니다. 어느 길모퉁이에는 스물 몇 살의 내가 걸어가고 있을 것 같고, 어느 방문을 열면 오래전에 만났던 누군가가 웃으며 나를 부를 것 같습니다. “수사님.” 그 한마디가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먼저 떠난 이들만 해도 수백 명이 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었고 얼굴이 있었으며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웃음이 있었고 서러움이 있었으며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었고,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건네주었던 따뜻한 손길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늘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내일도 만나고, 다음 주에도 만나고, 내년에도 만날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곁에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빈자리를 보고서야 알게 됩니다.

 

사람은 떠난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식탁의 빈자리 하나, 방 하나, 이름 하나, 습관처럼 건네던 인사 한마디가 그렇게 크게 다가올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수백 번의 죽음을 보내면서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익숙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많이 본다고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을 보내고 또 한 사람을 보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있다는 것은 영원히 곁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시간 동안 온전히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떠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먼저 떠났고 나는 조금 더 남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심원의 묘지와 오래된 길과 익숙한 건물 앞에 서면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래된 질문 하나가 다시 살아납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 많은 날 동안 무엇을 붙들고 살았으며, 무엇을 놓치며 살았는가. 그리고 이제 남아 있는 시간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1986년의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려 했을 것입니다. 젊었으니까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좋은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에게 다른 대답을 가르쳐 줍니다. 이제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있었는가를 묻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보다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묻게 됩니다. 얼마나 인정받았는가보다 누군가의 외로운 시간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성심원이 내게 가르쳐 준 가장 큰 복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결국 사랑한 만큼 남는다는 것. 세월은 업적을 지워가지만 사랑의 흔적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는다는 것. 한센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았습니다. 병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도 보았습니다. 세상의 시선과 편견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보았습니다. 상처 입은 몸 안에도 존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 안에도 하느님의 얼굴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었던 상처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만났던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책보다 이곳에서 조금 더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다가간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상처 입은 사람의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그 손이 나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심원은 내게 나환자의 자리였고, 복음의 자리였으며, 나 자신의 가난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40년 세월을 건너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이번에는 일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관구 연피정을 하러 왔습니다. 참 묘합니다. 젊은 날에는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하느라 바빴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머물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때에는 부식을 마련하고, 후원자를 만나고, 시설을 살피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느라 이곳의 길을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내 삶을 돌아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아주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나를 이 자리로 데려오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잊었고,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을 잊었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젊은 수도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이들의 마음을 잊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사람을 통하여 나를 찾아오셨던 하느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피정은 어쩌면 새로운 것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오래된 은총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잊었던 얼굴을 기억하고, 잊었던 고마움을 기억하고, 잊었던 눈물을 기억하고,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다시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기억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기억은 오늘을 다시 살아내기 위한 은총입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그들이 내게 남겨준 사랑은 아직 내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건넸던 웃음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어느 할머니가 잡아주었던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으며, 말없이 바라보던 어느 형제의 눈빛 하나가 내가 수도자로 살아온 긴 세월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떠받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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