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제 독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는 코린토 신자들이 아직 육적인 사람이라고 꾸짖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어쩌면 ‘아직도’이고,
우리도 코린토 신자들처럼 세례 성사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했지만
아직도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여럿 있지만
제 생각에 그 가운데 하나가 분열과 일치입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성령은 일치하게 하고 육의 영은 분열하게 합니다.
성령이 일치하게 한다는 것은 너무 자명하고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수없이 얘기합니다.
그리고 특히 코린토 1서 전체가 이 성령의 일치를 얘기하기 위해 쓰인
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12장 13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세례받고 한때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코린토인들처럼 지금 분열과 파당과 대결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또는 다시 육의 영을 지니고 사는 겁니다.
그러므로 육의 영은 분열의 영이라고 단언할지라도
잘못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오늘
육의 영이 무엇이길래 분열케 하는지 그걸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육의 영은 천상을 향하게 하기보다는 지상을 향하게 하고,
내세를 향하게 하기 보다는 현세를 지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사람을 현세적 인간이라고 칭하였지요.
그러나 육의 영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지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본래 자기중심적이고 이것을 저는 원죄적인 경향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례와 함께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육의 영은
나만 알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좋아하며 친교를 맺게 합니다.
그러니 반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은 모르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고,
나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지요.
이렇게 해서 내 편과 네 편이 생기고
사랑을 하더라도 내 편만 사랑하여
파당과 분열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성찰과 반성은 내 안으로
관심과 사랑은 나 밖으로 향하는,
그런 성령의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