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오늘 심란하십니다.
제일 먼저 유다가 배반하고 이어서 믿었던 베드로마저 배반할 것이며
요한을 제외하고 다른 사도들도 배반할 것이기에 심란하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수고가 헛수고가 된 것으로 인한 심란함과
그렇게 공을 쏟은 제자들이 여전히 세속적인 것으로 인한 심란함과
특히 당신을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운명에 대한 연민으로 심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주목하는 것은 요한복음을 포함하여 우리 복음서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심란해하시는 주님의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 주님의 신성을 감추시려는 마르코복음과 달리
신성을 적극 드러내는 것이 요한복음인데도 이 요한복음마저
주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더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아지신 주님의 사랑 말입니다.
우리의 자식 농사가 헛수고 되는 것처럼 주님도 제자들 농사가 헛수고가 되고,
우리의 자식들이 신앙에 더 열심하길 바라는데 그렇지 않아 걱정하는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도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때문에 걱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공통적으로 ‘주님의 종’과 주님께서
인간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서시는 모습도 보여주십니다.
곧 이사야서와 복음은 이렇게 그 반전을 묘사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자신을 보고 제자들을 보면 헛수고와 어둠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면모이고 주님께서도 지니신 어둠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런 면모 덕분에 주님도 이러셨구나 하며
우리의 헛수고와 실패에 대해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고 위안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님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위안만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처럼 반전 곧 ‘그러나’와 ‘이제’가 이어져야 합니다.
나 자신과 인간을 보며 어둠만 봤다면
‘그러나’ ‘이제는’ 주님처럼 눈을 돌려 하늘을 보며 빛을 보고 영광도 봐야 합니다.
인간은 어둠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빛이십니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이제 하느님께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자기와 이웃의 어둠 가운데서 허우적거렸지만 이제는 빛을 봐야 합니다.
이제까지 어두웠던 것은 빛을 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그랬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 하고,
어둠만 보던 어둠에서 빛을 보는 빛으로 넘어가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