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과 베짜타 못의 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는 두 가지 강렬한 물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솟아나와 온 세상을 살리는 '에제키엘의 생명수'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을 바라며 모여든 이들의 절망이 서린 '베짜타 못의 물'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묻습니다.
1. 성전 오른편의 물 : 멈추지 않는 은총의 확장
에제키엘 예언자가 본 환시에서 물은 성전 오른쪽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옵니다. 처음에는 발목에 찼던 물이 무릎, 허리를 지나 나중에는 사람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됩니다. 이 물은 단순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입니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죽었던 바다가 살아나고 수많은 생명이 번성합니다. 신앙은 성전 안에만 갇혀 있는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미사에서 시작된 은총은 세상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발목' 정도의 결심일지라도, 그것이 계속 흐를 때 세상을 정화하는 거대한 강물이 됩니다.
2. 베짜타의 38년 된 병자 : "일어나 걸어가라"
베짜타 못가에는 수많은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물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낫는다는 전설 때문이었죠. 그곳에는 38년 동안이나 기회를 잡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며 자신의 무력함과 고립을 한탄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물으신 뒤, 물이 흔들리길 기다리게 하는 대신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조건'이 갖춰지기만을 기다립니다. "누가 도와주면", "상황이 좋아지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다고 말하곤 하죠.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마비된 의지를 향해 직접 말씀하십니다. 기적은 외부의 환경(연못의 물)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응답해 스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3. 두 이야기의 만남: 고여 있지 않는 신앙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살리는 힘'이고, 베짜타에서 일어나라는 명령은 '살아나는 응답'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이 베짜타 못가에 누워 있는 병자처럼 영적인 무기력증에 빠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세상이라는 거친 풍파 속에서 나만의 안일한 '들것'에 누워 있으려 합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는 지금도 우리 곁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 물은 사해(죽은 바다)와 같은 우리의 메마른 일상을 되살리려 합니다. 일어남: 38년 된 습관과 패배주의에서 일어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에제키엘이 물속으로 깊이 들어갔듯이, 주님의 은총에 온전히 몸을 맡겨야 합니다. 나의 들것은 무엇입니까? 성전 오른편에서 흐르는 물은 우리가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베짜타 못가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언제까지 남 탓만 하며 누워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준 생명의 강물이 흐르고 있으니, 이제 네 들것을 들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거라." 우리가 들고 일어서야 할 '들것'은 더 이상 고통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치유를 증언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안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사랑의 물줄기를 막지 말고 세상으로 흘려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 제가 베짜타의 병자처럼 환경을 탓하며 누워 있지 않게 하소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당신의 생명수에 온몸을 적시고, 오늘 제가 누워 있던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희망을 향해 걷게 하소서. 아멘.
흐르는 은총과 일어나는 인간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흐르는 물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리는 물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본 물은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조용히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은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는 작은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무릎을 지나고 허리를 지나 마침내 사람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되었습니다. 그 강은 죽은 바다로 향했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곳, 소금기만 남아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곳,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한 곳으로 그 물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죽었던 물이 살아났습니다. 썩은 바다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기 시작했고 메마른 땅에는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가 자라났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흘러갔습니다. 은총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한쪽에는 전혀 다른 물이 있었습니다. 베짜타의 못. 그곳의 물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물을 바라보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물결이 흔들리면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된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못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마비된 사람, 그리고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 있던 한 사람. 그는 말합니다.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병보다 더 깊은 것이 숨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누워 있으면서 생긴 영혼의 마비입니다. 사람은 오래 누워 있으면 일어나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처음에는 고통 때문에 누워 있지만 나중에는 습관 때문에 누워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도움에 달려 있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이 질문은 몸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정말 일어나고 싶으냐?”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병보다 자신의 들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들것은 고통의 자리이지만 동시에 익숙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들것 위에서는 세상을 탓할 수 있고 자신의 책임을 미룰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물 속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대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여기서 복음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그의 들것을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그 들것을 들고 가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들것은 더 이상 수치의 자리가 아니라 은총의 증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 그를 묶어 두던 것이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는 표징이 됩니다. 에제키엘의 강과 베짜타의 못은 사실 우리 마음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도 있고 베짜타 못가에 누워 있는 병자도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우리 안의 강물이 흐르지만 어떤 날에는 우리는 들것 위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누워 있습니다. “상황이 좋아지면 하겠습니다.” “누가 도와주면 일어나겠습니다.” “조금 더 준비가 되면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지 않습니다. 은총은 흐르는 사람에게 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하지 말라.” 왜냐하면 자기 것으로 붙잡는 순간 은총은 흐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가난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총이 막히지 않도록 자신을 비워 두는 삶입니다. 물이 흐르려면 강이 비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생명수가 흐르려면 우리 마음이 비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성전의 생명수는 이미 흐르고 있습니다. 그 물은 우리 기도의 자리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일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한마디의 따뜻한 말, 누군가의 짐을 조용히 들어 주는 손,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견디는 마음, 그 작은 물줄기들이 세상을 살리는 큰 강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들것 위에 누워 있겠느냐.” “내가 너에게 생명의 강을 주었으니 이제 일어나 걸어가거라.”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미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우리는 조용히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제까지 우리를 묶어 두었던 그 들것을 이제는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는 표징으로 어깨에 메고 세상 속으로 걸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