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모세가 이스라엘이 위대한 민족이라고 하니
저는 오늘 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 위대한지 보려고 합니다.
부를 때마다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셔 주시니 위대하다고 하니
저도 같은 맥락에서 위대함에 대해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가까이 계셔 주신다는데
저에게도 우리 국민에게도 북한 사람에게도 일본 사람에게도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셔 주신다고 반박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셔 주시는 것 아니고,
그런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하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위대한 것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셔 주셔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을 부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모세는 분명 이렇게 말하지요.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이라고.
그러므로 위대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끼는 사람이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위대합니까?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 계신 것도 모르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더더욱 못 느끼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도 관심이 전혀 없는데
가까이 계심을 느끼고 하느님을 부르니 위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저는 분명 위대하고 여러분도 위대하시고
그런 정체성과 자부심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말씀입니다.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제가 느끼고
또 하느님을 부르며 늘 기도하는데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지 그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계명 지킴에는 위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신뢰심 가지는 것까지는 좋으나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믿어서일까 계명 실천에는 자의적이고 방자하니 말입니다.
저는 정말 계명 실천에 있어서 갈수록 자의적(恣意的)입니다.
앞서 봤듯이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믿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뭘 하든 사랑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첫째가는 계명 대신 다른 계명들에 얽매였던 과거 반성 때문에
사랑을 다른 뭣보다 중시하겠다고 한 것이 점점 확고해지고 굳어진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작은 계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제게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은 작은 것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는,
예를 들어 금요일 금육제 같은 것을 저도 충실히 지키고 신자들에게도
함부로 관면 주지 않는 그런 실천이 아닐까? 이런 반성도 하는 오늘 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