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 요한 사도 축일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복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으니
저희에게 슬기를 주시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는데
사도 요한을 통하여 계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를 통해 심오한 말씀의 신비를 깨달아야 하는데
요한이 복음과 서간을 통해 전한 말씀의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서간에서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에 관해 이렇게 전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말하는 말씀은 귀로 듣는 말 이상의 것이고,
있어 온 것 곧 존재자이며 요한복음의 첫 구절의 그 말씀이십니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말씀의 심오함을 전하는데 이렇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여기서 ‘한처음’은 천지가 창조되던 그 처음보다도 앞선 처음이며
그러니까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신 분이시고,
창세기 1장에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천지를 같이 창조하신 말씀께서
이 세상에 육을 취하여 오셨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사도 요한은 이 분을 귀로 듣고 눈으로 봤으며 손으로 만져봤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이 말을 왜 합니까?
그분 말씀을 나는 내 귀로 직접 들었으며
너희가 못 본 분을 나는 직접 보고 만져봤다고 뽐내려는 것이고 자랑하는 겁니까?
사도 요한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이고
우리도 자기와 같이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며
그가 초대하는 친교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초대하는 우리의 친교는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교이며
우리끼리만 나누는 인간적인 친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빼놓고 우리끼리 친교를 나누고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친교도 일치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친교는 주님 말씀을 같이 듣는 친교,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을 같이 바라보는 친교,
진리의 길이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께 같이 가는 친교,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같이 나누는 친교여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