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는 관계적 사랑을 배우는 학교 (성탄절 묵상)
예수님의 육화와 하느님의 가난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길입니다.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한없이 낮아진 사랑의 구체적 진실, 하느님의 육화는 전능이 능력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능력을 내려놓는 선택으로 우리 앞에 서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배고픔을 알지 않으셔도 되었고, 거절당하는 고통을 배우지 않으셔도 되었으며, 사랑받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겪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인간의 조건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 안에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하느님의 가난이 숨어 있습니다.
1. 육화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가난해지기로 내린 결단입니다. 육화는 단순히 “몸을 입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존을 받아들이신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젖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 말을 배우기 전까지 아무것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던 분이 되셨다는 사실, 이것은 신학적 장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난의 깊이를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필요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관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육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 대상”으로만 남겨두지 않으시고, 관계의 상대로 받아들이신 사건입니다.
2. 하느님의 가난은 힘의 부재가 아니라, 힘의 포기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으심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압도하지 않으셨고, 설득하지 않으셨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기다리셨습니다. 거절당할 가능성을 안고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가난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보호하는 힘을 내려놓을 때만 비로소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위해 신적 안전지대를 떠나셨습니다.
3. 육화의 신비는 ‘관계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육화의 신비는 혼자서 묵상한다고 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신비는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구체적인 진실이 됩니다. 이해받지 못했을 때에도 떠나지 않는 마음, 상대의 속도를 존중하기 위해 내 속도를 늦추는 선택,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보다 관계를 살리는 침묵, 이 순간들 속에서 육화는 다시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조건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관계의 불완전함을 감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오해받을 수 있고, 왜곡될 수 있고, 배신당할 수 있는 자리, 그 자리를 하느님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4. 우리의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육화, 육화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바꾸려는 유혹을 내려놓을 때, 내가 옳다는 확신보다 상대의 아픔을 먼저 헤아릴 때, 관계를 위해 나의 정당한 권리를 잠시 접을 때, 그 자리에 하느님의 가난이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은 관계 안에서 언제나 먼저 가난해지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가난으로 초대하십니다.
5. 한없이 낮아진 사랑이 드러내는 놀라운 진실, 하느님의 육화가 드러내는 가장 놀라운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바꾸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머물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은 먼저 “함께 계심”으로 시작됩니다. 고쳐진 이후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육화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가장 낮은 지점까지 동행하겠다고 결정하신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은 우리에게 요구가 아니라 초대입니다. “너도 나처럼 낮아져라”가 아니라 “나처럼 사랑해 보지 않겠느냐”는 부름입니다. 관계 안에서 조금 덜 이기려 할 때, 조금 더 기다려 줄 때, 조금 더 함께 머물 때, 그 자리에 하느님의 육화는 지금도 조용히 숨 쉬고 있습니다.
6.육화는 관계적 사랑을 배우는 학교, 육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오신 사건이기 전에, 하느님께서 사랑을 ‘배우기 위해’ 인간의 자리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학교란 정답을 이미 아는 이가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실수하고, 기다리고, 다시 배우는 시간이 허락되는 공간입니다. 육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표에 자신을 맡기신 사랑의 학교입니다.
7. 육화는 전능을 내려놓고 관계를 선택한 입학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을 설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사랑이 어떻게 상처받는지, 사랑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사랑이 오해 속에서 어떻게 침묵하는지를 몸으로 배우셨습니다. 아기로 태어나 말을 배우듯, 관계를 배우셨습니다. 이것이 육화입니다.
8. 관계적 사랑은 통제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관계적 사랑은 상대를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상대가 자유롭게 응답하도록 공간을 남기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실 수 있었지만 먼저 묻는 분이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기적을 지연시키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관계를 존중하는 질문입니다. 육화의 학교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배우십니다. 사랑은 빨리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용기라는 것을.
9. 육화의 교실은 관계의 불편함 속에 있습니다. 육화의 학교는 조용하고 안전한 교실이 아닙니다. 배척당하는 자리, 이해받지 못하는 대화, 침묵으로 남겨지는 관계, 이 모든 곳이 육화의 교실입니다. 하느님은 관계의 불편함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불편함 안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편안한 거리에서는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10. 우리는 이 학교의 학생입니다. 육화는 예수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교육 과정입니다. 우리가 관계 안에서 속도를 늦출 때, 상대를 바꾸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내가 옳다는 증명보다 관계의 생명을 선택할 때, 우리는 육화의 학교에 다시 입학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다시 배우십니다. 사랑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11. 이 학교에는 졸업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완성되는 기술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 배우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육화 학교의 졸업식이 아니라, 끝까지 자퇴하지 않은 사랑의 증명입니다. 도망칠 수 있었지만 머무르신 분, 증명할 수 있었지만 침묵하신 분, 구할 수 있었지만 함께 고통받으신 분. 그분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육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신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관계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지금도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사랑을 힘으로 하려 하느냐? 아니면 함께 배워 가려 하느냐?” 육화는 관계적 사랑을 배우는 하느님의 학교이며, 우리가 평생 다니게 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위대한 학교입니다.
